샌더스와 코르테스, 심상정과 장혜영

버니 샌더스 46대 미국 대통령 당선.

비록 뉴햄프셔에서 간신히 득표수 1위를 했지만 나는 아직은 샌더스가 민주당 후보가 될 가능성이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21세기는 누가 강렬한 에너지와 팬덤을 가지고 있는가가 중요하기 때문이다. 과거 확장세는 약했지만 열정적 지지세가 강했던 트럼프도 예상을 깨고 공화당 후보가 되었다. 비록 앞으로 기업주의 국가를 꿈꾸는 블룸버그 전 시장과의 혈투 등 변수가 너무 많지만 을의 위치에 있는 이들은 샌더스의 든든한 기반이다.

만약 샌더스가 민주당 후보가 된다면 미국 역사상 가장 흥미로운 진보 포퓰리즘 대 우파 포퓰리즘의 혈투가 될 것이다. 과거 뉴딜 진보주의 시대를 만들었던 루스벨트는 원래 블룸버그의 기업주의 제국 DNA에 더 가까웠다. 만약 샌더스가 대통령이 된다면 뉴딜 시대에 일부 주 차원에서만 영향력이 있었던 사회민주주의가 행정부에서 전면 시도되는 역사적 의미를 가진다. 1912년 공화주의적 사회주의자 후보였던 유진 뎁스, 1984년 사회민주주의자 후보였던 제시 잭슨의 오래된 꿈이 2020년 현실화되는 셈이다. 샌더스는 아직도 호주머니에 유진 뎁스의 열쇠고리를 지니고 다닌다.

미국 진보 진영에 더 희망적인 사실은 현재만이 아니라 그 이후도 잡을 가능성이 생겼다는 점이다. 바로 민주당의 미래를 상징하는 샛별인 알렉산드리아 코르테스 뉴욕 하원의원이다. 샌더스가 탄핵 심판으로 상원에서 발이 묶인 동안 그녀의 유세가 없었다면 샌더스는 지금보다 더 어려웠을 것이다. 아직 거칠고 유연성이 떨어지지만 그녀는 폭풍 성장 중이다. 샌더스 이후 최초의 여성 대통령으로 그녀가 바통을 이어받는다면 과거 뉴딜 시대보다 더 진보적인 뉴딜 2.0을 시도해 볼 수도 있다.

나는 샌더스의 록 콘서트보다 더 뜨거운 유세장에서 자꾸만 백기완과 노회찬이 떠올라 눈물이 났다. 군사독재 치하의 엄혹한 시절, 텔레비전에서 백기완 민중의당 후보의 사자후가 터져 나올 때 난 그날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그리고 한국에서 최초로 합법적인 노동자 정당 추진위원회가 출범했을 때 청주교도소에서 노회찬의 상기된 얼굴을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평소 지나칠 정도로 감정을 절제하는 그답지 않게 그날 노회찬은 첫사랑에 빠진 소년처럼 들떠 있었다. 당시 백기완과 노회찬에 가슴 뛰던 나의 심장은 촛불과 문재인 현상에 온도가 데워지다가 최근 다시 싸늘하게 식어버렸다. 하지만 샌더스와 코르테스를 보면서 다시 심장이 두근거린다. 내 머릿속에는 질문들이 스쳐 간다.

한국의 심상정은 샌더스가 될 수 있을까? 수십 년간 등대처럼 우직하게 한자리를 지켜온 샌더스의 시간이 드디어 온 것처럼 노회찬과 함께 자리를 지켜온 심상정의 시간이 올 수 있을까? 다보스의 주류 엘리트들조차도 이야기하는 이해관계자 자본주의(더불어 함께 살아가는 거버넌스)와 기후 비상 위기 대응을 촛불의 나라인 우리가 못할 이유란 무엇인가? 공존과 동등성, 그리고 인간존엄이 시대정신이라는 걸 <기생충>과 BTS가 걸출한 예술로 표현했다면 심상정을 비롯한 범진보 진영의 리더들은 담대한 정치로 증명해야 한다.

한국의 다큐 영화감독 장혜영은 코르테스가 될 수 있을까? 나는 코르테스와 장혜영의 열렬한 팬이다. 그들의 연설문은 그저 듣기 좋은 말이 아니라 치열한 ‘진리 안에서의 삶’으로 뒷받침된 꿈틀거리는 언어다. 그들은 비록 하버드 대학 로스쿨을 나오지는 않았지만 어느 변호사보다 더 명료하게 사회의 위선과 문제를 드러낸다. 코르테스의 의회 청문회 영상과 장혜영의 ‘세상을 바꾸는 시간’ 강연은 로스쿨 교재로 적당하다. 퇴조해가는 미국과 달리 눈에 잘 보이지 않는 약자들의 희생을 대가로 편하게 살아가길 거부한 장혜영과 범진보 진영의 넥스트 도전자들은 우리에게 상승하는 미래가 가능할 수도 있다는 걸 보여준다. 이들은 BTS의 <봄날> 뮤직비디오에 나오는 ‘오멜라스를 떠나는 사람들’의 정치적 재현이다. 기존 리더들이 현재의 시간을 열어가고 이들이 미래의 시간으로 함께 떠나야 한다.

물론 샌더스와 코르테스, 심상정과 장혜영과 같은 이들 앞에는 거대한 장벽이 기다리고 있다. 난 며칠 전 종영된 <스토브리그>의 마지막 회 결말이 좀 아쉽다. 드라마는 코리안 시리즈 우승을 누가 할지를 결론 내지 않고 시청자의 몫으로 남기며 애를 태운다. 정의로운 원칙에 입각해도 승리할 수 있는 세상을 만들고 싶은 그 구단주의 꿈은 과연 실현되었을까? 그의 새로운 도전은 무엇일까? 너무 궁금해서 작가님에게 <스토브리그 시즌 2> 집필 청원운동이라도 하고 싶다. 하지만 난 안다. 시즌 2는 우리가 먼저 열어야 한다는 것을.


경향신문 [정동칼럼] 2020년 2월 16일
이미지 | 구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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