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철수의 ‘퀸즈 갬빗’

정계 개편의 서막이 올랐다. 안철수 대표가 마치 넷플릭스의 드라마 <퀸즈 갬빗>처럼 던진 퀸즈 오프닝(체스의 초반 전략)으로서 서울시장 도전 말이다. 상황 전개에 따라 시즌1의 결말이 여권의 서울시장 선거 패배는 물론 안철수·윤석열(+α) 중도연합의 대선 석권까지 배제할 수 없다. 여권은 분열할 것이다.

나는 조국 사태 초기 여권에 조국 후보자를 철회하라고 조언한 바 있다. 하지만 이들은 이후에도 가치와 중장기적 전략, 전문가 경청 대신에 단기 시야 속에서 정치 어젠다는 물론이고 코로나19 방역조차 오만하고 무능하게 대처했다. 더구나 그 폭압적 군사독재 시절에 진보의 가치를 위해 목숨을 걸어 본 적도 없는 인간들이 감히 진보의 이름으로 그 중요한 검찰개혁 과제를 향후 미로 속으로 밀어 넣었다. 절차적 적법성과 정당성을 무시한 윤석열 징계와 진보의 법치주의 핵심 가치인 시민(대통령이 아니라)의 통제권도 없는 공수처법 개정이기 때문이다. 이는 좀비 상태인 수구 진영에 수혈과 정권 교체 시의 복수 기회를 열어줄 가능성이 높다. 나중에 이 주역들은 역사와 현실의 법정에 불려 나올 운명이다.

나는 지금 정부와 달리 과거 노무현 시대를 좋은 의미에서 ‘자유주의적 포퓰리즘’ 유형이라고 본다. 노무현 정부는 견제와 균형, 심의적 합의 등 자유주의 가치와 서민들을 위한 기득권과의 투쟁이라는 포퓰리즘 운동이 결합된 정부다. 문재인 정부의 운동적 정서와 포퓰리즘의 부작용을 지적하는 최장집 석학의 애정 어린 고언과 달리 나는 정반대로 너무 부족한 게 문제라고 본다. 입시 조작과 투기 재능으로 상위 20%가 되는 것에 더 관심이 있는 이들이 있는 정부에 운동적이라는 비판은 지나친 칭찬이다. 중대재해법과 자영업자에게 애초에 무관심했던 이들을 서민의 대변자인 포퓰리스트라 비판하는 건 과찬이다. 국민과의 소통을 회피하고 초월적 태도를 취하려는 대통령이 포퓰리스트? 그럼 노무현 정부와 달리 문재인 정부는 자유주의가 아닌 권위주의와 결합이라도 했단 말인가?

그렇다. 잉글하트와 노리스 교수는 지구적으로 부상하는 권위주의 포퓰리즘을 작년 출간된 <문화적 백래시>에서 분석한 바 있다. 잉글하트에 따르면 권위주의 경향이란 자기 진영 리더에 대한 충성(우리 이니!)과 순응주의(금태섭 제명!)를 강조한다. 반면에 법적 지배, 자의적 권력에 대한 견제와 균형, 개인의 자유, 심의적 숙고, 소수의 권리 같은 민주공화국의 헌정주의와 자유주의 가치를 훼손한다. 애초에 약자의 인권과 다원성 등 자유주의적 가치가 녹아있는 중대재해법과 차별금지법에 일부 의원들을 제외하고는 민주당이 무관심했던 건 우연이 아니다.

도대체 서구 우파 정부나 혹은 한국의 유사 파시즘의 박근혜 정부와 달리 촛불로 태어난 정부가 왜 기이하게 권위주의 경향을 띨까? 잉글하트의 진단에 실마리가 있다. 즉 진영의 불안감이다. 우리의 리더와 진영을 이번에는 보호해야 한다는 절박감과 이를 이용하는 정치꾼들이 권위주의에 기울어지게 한다. 이들은 왜 김대중이 자유주의자이자 생명존중가인 하벨을 그토록 좋아했고 노무현이 왜 공화주의자 링컨을 연구했는지 이해하지 못한다. 이들은 왜 영원한 운동가인 민주당의 김근태와 정의당의 노회찬이 괴물을 상대로 인간다운 가치와 자유주의의 경계선을 지키며 싸우기 위해 몸부림쳤는지 이해하지 못한다.


앞으로 한국은 3가지 정치 모델이 서로 각축하거나 혼합될 것이다. 첫째가 권위주의적 다수주의 경향의 문재인 노선을 그저 이어갈 관리형들이다. 이들은 중도를 많이 상실했기에 의외의 인물을 등장시켜도 대선 본선에서 패배할 가능성이 높다. 둘째가 자유주의적 중도연합이다. 이들은 법적 지배와 견제와 균형이라는 (중도) 자유주의 가치와 합리적 보수주의를 결합할 가능성이 높다. 반(反)정치의 정치가인 안철수, 윤석열에 김동연 등 합리적 보수파들이 적절한 전략으로 하나의 진영으로 재구성되면 야권의 정계 개편을 주도할 가능성이 있다. 마지막으로 가장 약한 모델이 (진보) 자유주의적 포퓰리즘이다. 이는 김대중, 노무현 및 김근태, 노회찬 노선의 연합인데 자유주의와 진보주의를 결합하면서 반(反)기득권의 포퓰리즘으로 보완한다. 이 ‘천하삼분’의 구도에서 누가 승리할지를 좌우할 최고의 수는 자유주의에 근거한 가치 어젠다이다. 한나 아렌트의 표현을 응용하자면 여의도 인사이더들이 길바닥에 버린 이 상승하는 시대정신을 누가 집어들 것인가가 시즌1의 첫 에피소드인 2021년 보궐선거와 마지막 회인 2022년 대선을 결정한다. 역시 대한민국은 넷플릭스보다 더 흥미롭다.

경향신문 [정동칼럼] 12월 21일
이미지 | 넷플릭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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