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당의 당론

아이쿠, 오늘도 어김없이 지인들에게 욕먹는 소재가 먼저 머리에 떠오르는 내가 참 싫다. 최근 여야는 인사청문회 ‘개혁’ TF를 구성해서 도덕성 검증은 비공개로 하는 안을 다시 논의할 모양이다. 사실 청와대 인사수석의 입장에서 보면 대한민국처럼 인사하기 어려운 나라가 없다. 심지어 능력 있는 분들이 거의 6명 이상 고사하는 끝에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이를 임명해야만 하는 경우도 있다. 사소한 실수도 마치 파렴치범으로 매도되고 가족들까지 모욕을 당하는 원형 경기장의 무대에 누가 오르고 싶겠는가? 우리 인준청문회의 원형인 미국은 심지어 정쟁으로 1년간 인준이 계류되어 있는 경우가 허다하다. 아마 집권 정당이 아닌 정의당도 무조건적인 반대가 아니라 국정을 고민하는 책임 있는 진보로서 비공개 도덕 검증을 당론으로 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래도 민주당은 이제 한국 사회의 주류가 되었으니 그런 ‘현실주의적’ 고민이 들 만도 하다. 하지만 집권당이 아닌 정의당까지 이런 당론을 가졌다는 사실은 좀 당혹스럽다. 적절한 비유인지는 모르나 마치 잘 나가는 큰아들과 좀 고생하는 작은 아들을 보는 아빠의 기분이랄까? 정의당에는 화려한 기득권 스펙을 가졌지만 자신과 가족의 무한한 희생 속에서 묵묵히 더 인간다운 사회를 만들어 온 아름다운 이들이 많다. 그런데 왜 정의롭게 살아온 그들이 기득권의 체제 공고화를 도와야 하는가?

그렇다. 비공개 도덕 검증은 결과적으로는 민심의 견제를 약화시키고 기득권 캐슬을 더 강화할 가능성이 높다. 특히 상위 20%는 적극적으로 환영 플래카드를 거셔도 좋다. 비공개 도덕 청문회에서 당적을 떠나 학연, 지연, 운동권 연의 지인들이 함께 모여 “선배, 좀 조심하지 그랬어”라는 덕담을 우아하게 나누는 현장이 눈에 선하다. 정작 초당적으로 협력해야 할 건 차별금지법, 중대재해법, 한반도 평화체제 구상이 아닐까?

엘리트가 주도하는 사회의 최소한의 전제는 공적 가치, 윤리적 정직성, 그리고 책임이다. 조선 시대에도 존재했던 이 덕목이 최근 퇴색하고 있다. 기이한 점은 얼마 전 대한민국은 사소한 단점에도 불구하고 김영란법이라는 윤리적 새 국면을 성취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세계가 부러워하는 ‘촛불 혁명’을 시작했고 그 핵심 세력인 청년은 모든 세대 중 상대적으로 가장 진보적이고 윤리적인 세대로 등장했다. 더구나 역대 공직자들 중 가장 윤리적이고 품위 있는 유형인 문재인 변호사가 대통령이 되었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 우리 진영을 수호한다는 미명 아래 최근의 세 가지 성취를 다 훼손하는 기이한 역설을 목도하고 있다. 문재인 대통령의 빈번한 인사 판단의 잘못을 더 후퇴한 인준청문회안으로 악화시킨다? 그리고 대통령을 견제해야 할 의회주의의 수장이 대통령의 인사청문회 ‘개혁’ 요청에 뼈아픈 비판 대신에 의회 TF 구성으로 응답한다? 지금 진행되는 현실은 무척 초현실적이다.

기득권의 자의적 지배를 타파하기 위해 모든 걸 걸었던 노무현을 비난했던 이가 법치를 우리에게 가르치려고 드는 건 블랙 코미디 영화의 한 장면 같다. 이순신의 부활을 알아보지 못하는 나는 이제 토착왜구라도 된 걸까? 그리고 법인카드를 함부로 긁은 이가 수조원의 국가 예산 결정에 직간접 영향을 미쳤다는 걸 생각하면 경악스럽기만 하다. 엘리트의 긴장감이 사라지면 그 공백을 누가 메꿀까? 우리는 미국 리버럴들의 90년대 탐욕과 무절제 속에서 트럼프라는 괴물이 탄생한 걸 똑똑히 보았다. 민주당과 정의당은 이후 한국판 ‘딥 스테이트’와 싸우는 트럼프의 탄생에 기여한 역사로 기록되고 싶은가?

일각에서는 사전 철저한 검증 후 본 무대에서는 정책역량 검증을 이야기하지만 결국 이는 청와대의 의지 문제이고 원래 사전 검증은 완벽하기 어렵다. 결국 김영란법 시대에 맞지 않는 인물은 조용히 자신의 영역에서 용맹정진하고 청와대는 더 널리 인재를 구할 길밖에 없다. 더 중장기적으로는 기존 내로남불 시대 윤리관에 아직 덜 물든 세대가 충분히 오랜 기간 훈련받고 인재풀로 활용될 기회를 제공해야 한다. 선진국인 우리는 왜 아직도 30대의 성공한 총리를 가진 뉴질랜드를 그저 유토피아처럼 바라보는가? 그들이 체계적으로 성장할 기회를 마련하기 위한 대담한 대안을 사회적으로 마련하지 않고 정은경 같은 비정치적 인물은 좌천시켜 왔기 때문 아닌가? 만에 하나 이후 인사청문회 ‘개혁’이 퇴행으로 간다면 그걸 통과시킨 이들에게 최대한 얼룩을 남겨야 한다. 그리고 한국 사회의 소위 상위 20% 엘리트들에게 등골이 서늘한 경고를 남겨야 한다. 오늘도 트럼프주의자들은 당신을 흥미롭게 지켜보고 있다.

 

경향신문 [정동칼럼] 11월 23일
이미지 | 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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