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검찰·법원’은 이제 바뀌어야

정치, 검찰, 법원, 각 영역의 진정한 소명은 무엇인가? 최근 장혜영 의원, 윤석열 검찰총장과 김명수 대법원장을 둘러싼 논쟁을 보면서 언뜻 스쳐가는 질문이다. 장 의원은 이번에 피해자의 존엄 보호 및 공동체적 성찰과 해결을 제기했다. 그런데 고통을 겪는 구체적 인간에 대한 공감능력이 항상 고장났던 일부 관념적 평론가들은 엉뚱하게 사법처리를 강요한다. 이에 대해서는 깊은 공부와 예리한 비평의 정희진과 홍성수 칼럼(경향신문 2월10일자)이 새로운 교과서가 될 만하다. 내가 첨언하고 싶은 부록은 이번 장 의원의 화두가 정치와 검찰, 법원 영역이 원래의 정신과 소명을 복원하는 중요한 계기를 제공한다는 점이다. 바로 인간 존엄 가치에 기초한 공동체의 통합적(Holistic) 문제해결 말이다. 이 점에서 미국은 이미 오래전에 민주당 정치와 사법체계에서 다양한 실험들이 일어나고 있다.

검찰의 소명은 그저 기소일까? 검찰주의자 윤석열 검찰총장은 해리스 미국 부통령과 대화할 필요가 있다. 해리스는 오래전 샌프란시스코 지방검사 시절, 고정관념에 사로잡힌 검찰조직의 비난을 받아가면서도 공동체적 문제해결을 선도했다. 버만과 파인블래트라는 혁신가들이 <좋은 법정>(Good Court)이라는 책(2005)에서도 잘 설명하듯이 이는 검사와 판사의 역할을 그저 기소와 심판으로 한정하지 않는다. 더 근원적으로 공동체와 협력하고 과학적 데이터에 근거해서 문제의 뿌리를 찾고 모두의 존엄과 회복을 도와주는 관점이다. 한국에서도 서울고법이 이 운동과 문제의식이 일부 수렴되는 ‘치료적 사법’의 관점을 치매를 앓고 있는 살인범죄자에게 적용하기도 했다.

정치의 소명은 그저 경쟁자(심지어 적)와의 투쟁인가? 사법 영역도 이제 문제해결 패러다임으로 전환되는 추세인데 정작 정치의 본령을 우리는 잊고 있다. 이번 정의당의 피해자 존엄 보호와 가해자에 대한 엄격한 징계 절차는 다소 부족했지만 다음에 목소리를 낼 모든 이들을 보호하기 위한 일보 전진이다. 이는 더 나아가 성폭력 사건만이 아니라 모든 취약한 자들을 위한 가치, 제도와 문화의 전환에 대한 정의론 논쟁으로 발전되어야 한다. 원래 우리가 민주화 운동을 시작한 이유도 정치의 소명을 복원하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대한민국은 만델라와 하벨의 인간 존엄(김대중)과 미래지향적 문제해결(노무현)의 정치 화두를 가진 걸출한 두 대통령을 배출했다. 그런데 지금 모든 취약한 이들과의 연대가 아니라 그저 우리 편인가 아닌가? 유죄인가 아닌가? 문자폭탄이 날아오는가 아닌가?의 세 가지 협소한 기준으로 후퇴해 버렸다. 이제 다시 정치란 원래 무엇이어야 하는가를 물어야 한다.

법원의 소명은 그저 법전에 기초한 판결인가? 과거 김명수 대법원장을 배출한 우리법연구회는 민주화 운동의 자랑스러운 전통이다. 좋은 판례들도 늘어나고 있다. 다만 이제 김명수 대법원장은 정치뉴스 보는 시간을 줄이고 성찰적 공부에 매진하시길 권유한다. 나 같은 정치학자가 제발 <비밀의 숲> 드라마 같은 대화 말고 훌륭한 판례를 가지고 헌정주의 수업을 할 수 있게 도와주시길 부탁드린다. 민주화 운동에 참여했던 우리법연구회는 이제 각종 사회적·경제적 차별과 폭력의 취약성에 노출된 이들의 문제해결 법원으로의 좋은 법정 운동을 연구해주시길 기원한다. 이미 서울고법 등의 훌륭한 시도가 있지 않은가?

정치, 검찰, 법원은 이제 바뀌어야 한다. 넥스트 가치의 리더인 장혜영 의원처럼 누구나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는 한 차원 높은 인간 존엄에의 철학과 문제해결의 태도가 ‘가치 나침반’이다. 특히 앞으로 경제 대위기, 신종 팬데믹, 기후위기, 국제질서 격변 등은 각 진영의 대처 용량을 넘어선다. 오직 모든 인간의 취약함과 상호의존성에 대한 겸손함 속에서 통합적·실용적 문제해결이 절실해진다. 기존 주류 자유주의를 넘어서는 이 가치를 며칠 전 평창 평화포럼에서의 코체 교수 표현을 빌려 ‘모든 취약한 자’(인간과 비인간)들의 정치학(Politics of Vulnerability)이라 부르고 싶다.


사실 부끄럽게도 정치와 검찰, 법원의 가치 결핍은 나와 같은 대학교수를 비롯한 교육의 실패와도 맞닿아 있다. 과연 로스쿨들이 법조문 너머의 실제적 생활세계의 철학과 통합적 해결을 얼마나 가르치는지 우리는 돌아보아야 한다. 비단 로스쿨만이 아니라 파커 파머의 지적처럼 교육은 ‘타자’를 사랑하는 법과 공동체의 통합적 문제해결을 잘 가르치지 않는다. 이제 존엄과 취약성의 철학 및 데이터에 근거한 문제해결이 공동체의 시대정신이 되도록 모든 영역에서 가치 리더십 전환 운동이 일어나야 한다.


경향신문 [ 정동칼럼 ] 2.15
이미지출처 | 민족사진연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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