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테그리티’가 훼손된 진보의 비극
인터넷과 민주화운동의 공통점은 ‘트릭 미러’(왜곡된 거울)이다. 지아 톨렌티노 뉴요커 기자의 걸작인 <트릭 미러> 책을 보다가 드는 생각이다. 인터넷은 한때 해방과 자유의 공간으로 찬사받았다. 하지만 인터넷은 결국 각 개인의 불완전한 자아에 정직하려고 하는 온전한 사람이 되는 것을 불가능하게 하는 왜곡된 장이라는 걸 이 책은 드러낸다. 어쩌면 내가 참여했던 80년대 민주화운동도 그 경이로운 성취에도 불구하고 자신과 사회를 정직하게 들여다보는 기능을 퇴화시킨 것인지도 모른다. ‘적폐’와 투쟁하는 가운데 부지불식간에 자아와 정체성은 부풀려지고 권력 욕망은 스스로를 속인다. 나는 민주화운동+인터넷 시대의 의도하지 않은 결합이 오늘날 나르시시즘, 성찰의 부재, 증오, 내로남불, 수치심 결핍이 작동하는 하나의 메커니즘을 생각한다. 이는 민주화를 곧 다수주의로 착각하는 사고의 한계보다 더 근원적인 문제의 뿌리이다.
최근 최장집 교수와 진중권 평론가는 걸출한 내공으로 자유주의, 헌정주의가 결핍된 다수주의의 한계를 예리하게 파헤치고 있다. 나는 이에 더해 모든 동등하고 다양한 시민 공동체, 즉 (생태) 공화주의가 결핍된 엘리트의 가치 빈곤을 이야기해 왔다. 왜냐하면 80년대 민주화운동 출신 정치인들은 성취도 많았지만 천민자본주의 시대 환경에서 향후 민주공화국에 걸맞은 가치를 고민할 기회가 적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더 근원적으로 보면 우리가 이 모든 가치의 토대로서 자신과 세계를 명징하게 보기 위한 ‘인테그리티’(Integrity)의 결핍이 더 뼈아프게 다가온다. 인테그리티?
번역하기에 까다로운 이 단어는 정직성, 고결함, 온전함, 훼손되지 않음, 통합성, 언행일치 등 다양한 뉘앙스를 가진다. 도널드 트럼프를 몰아내려 했고 정년이 보장된 직위를 항의표시로 던진 모든 움직임을 그저 권력투쟁이나 딥스테이트의 음모라고만 생각하는 이들은 아직은 미국이 버티는 저력을 전혀 모르는 자들이다. 트럼프와 조 바이든은 이 인테그리티의 극도로 상반된 지점에 서 있다. 바이든 대통령은 선출된 군주로서 대통령 개인이나 국회 다수당이 아니라 헌법과 공직의 소명에 충실한 법무부 장관과 선거제도의 인테그리티를 강조한다. 변희수 하사의 안타까운 죽음 이후에도 문재인 대통령이 별 관심이 없어 보이는 차별금지법도 바이든 대통령은 훼손되지 않아야 할 존엄한 인간의 인테그리티를 지키는가의 관점에서 바라본다.
이 낯설어 보이는 영어 단어가 그저 미국이란 우아한 환경을 가진 나라만의 덕목일까? 천만에. 비록 조선과 대한민국의 역사는 기득권들의 탐욕스러운 이익의 역사로 점철되지만 이념을 떠나서 각 개인과 조직, 나아가 정치제도의 온전성을 지키고자 한 소수자들의 피눈물의 역사이기도 하다. 다행스럽게도 현대에 들어와서 김대중, 노무현, 김근태, 노회찬은 거의 불가능한 조건에서도 이 인테그리티의 토대 위에 선 중도 혹은 진보 자유주의를 꿈꾸었다. 합리적 보수인 고 박세일 서울대 교수는 왜곡되지 않는 “지적 정직성”(인테그리티)에 기반한 공동체 자유주의 화두로 화답했다. 하지만 이제 다시 소용돌이와 내로남불 정치의 저주가 한국을 휘감고 있다. 톨렌티노는 “미래의 우리는 필연적으로 경박해질 것이다”라고 경고하는데 우린 이미 너무나 경박하다. 최근 소위 운동권 정부라는 문재인 정부는 심지어 새마을운동 조직을 초당적인 생태 민주주의로 발전시킨 정성헌 전 회장을 싸늘하게 버렸다. 아니 심지어 자기 월급이 많다고 정색을 하고 깎고 관용차를 반납했던 인테그리티와 민주화운동의 상징을 내치면서 정작 임명할 인물이 없다고 불평하는 건 뭐지? 그래서 나는 언행일치가 되지 않은 이들이 이야기하는 그린 뉴딜과 국민통합에 회의적이다.
앞으로 대한민국은 문재인 행정부에 대한 실망감 속에서 자유주의 중도 연합이나 3당 합당 2.0이 현실화될 수도 있다. 보다 운이 좋으면 누적된 기득권을 솜씨 있게 타파하는 진보적 포퓰리즘이 성공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인테그리티에 대한 문제의식이 약한 역사적 경로를 가지는 진보주의의 미래가 두렵다. 기본소득 대 고용보험 확대, 기본주택 대 평생주택 논쟁도 좋지만 각 개인과 시민사회에서, 그리고 제도권 정치에서 인테그리티라는 화두를 어떻게 제도적·문화적으로 뿌리내릴까 하는 고투가 없다면 우리는 영영 소용돌이와 왜곡된 거울 안에 갇힐 운명이다. 우리의 철학과 역사에 정통하신 분께서 우리말로 대체할 좋은 어휘를 제시해주시면 좋겠다. 앞으로 롤러코스터의 1년간 ‘LH로남불’ 대신에 인테그리티를 표현하는 사자성어가 유행어가 되었으면 하는 마음 간절하다.
경향신문 [ 정동칼럼 ] 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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