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준석 현상’을 말하다
마지막 칼럼은 좀 더 긍정적이고 따듯한 주제로 쓰고 싶었다. 하지만 이준석 현상을 바라보면서 생각이 바뀌었다. 이 사건은 현재 진보진영 내 주류들이 가진 한계를 보여주는 거울이다. 나는 이를 5가지 정치학으로 이해한다.
진정성을 ‘표현하는’ 정치학. 이재명은 계산하고 이준석은 내뱉는다. 물론 당내 지형이 제약하는 곤혹스러움이 있다. 하지만 사람들이 최근 이재명의 말에 하품하고 윤석열의 선문답에 답답해하는 사이에 이준석은 쇼미더머니 게임을 평정했다. 누구의 마음속에 진정성이 있는가는 적절한 질문이 아니다. 많은 유권자가 그렇게 생각한다는 사실이 정치에서는 더 중요하다. 역사는 언제나 진정성을 드러내는 문법을 습득한 자가 승리한다.
반골 정치학. 진보는 삐딱함으로 혁신하고 보수는 안정감으로 승부한다. 아, 그 교과서가 지금 뒤집혔다. 그간 이준석은 부단히 실패하면서도 도전하는 태도를 완전히 버리지는 않았다. 그가 그냥 시민들이 가진 기득권 정치에 대한 반감에 올라탄 운 좋은 청년이라고만 생각하는 이들은 그가 해온 실패의 여정을 다시 복기하길 권한다. 반골 DNA를 보수에 내주면 진보는 그저 세련된 보수가 된다.
능력주의 정치학. 이준석은 지금 새로운 시대정신 중 하나인 능력 만능주의 전도사이다. 물론 마이클 샌델 하버드대 교수의 지적처럼 능력주의는 애초부터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결국 엘리트들의 영구지배를 완성해간다는 점에서 야비한 논리이다. 하지만 지금까지 한국 사회 기득권 정치는 능력주의만이 아니라 부족주의의 특징이 강했다. 조국 현상은 ‘우리가 남이가’의 부족주의에 너희는 스펙을 가공하거나 강남에 살 기회를 굳이 가질 필요가 없다는 능력주의가 결합했다는 점에서 참 혁신적이다. 이준석은 ‘싸가지’ 없는 능력주의자(및 기술만능주의자)일 수는 있어도 최소한 자기 진영을 무조건 감싸지 않았다. 위선적으로 스펙을 가공하지도 않았다. 원래 능력주의는 부족주의에 비해서만 보면 상대적으로 자유주의로의 진화이다. 그리고 이 능력주의를 비판하다가 아예 엘리트주의의 장점마저 버리면 시민은 진보를 버린다. 한 사회는 아래로부터 민중의 역동성과 위로부터 엘리트주의 책임 간의 긴장과 균형으로 움직인다. 민중주의가 왜 더 우위에 서야 인간다운 사회로 갈 수 있는지를 유능하게 실력으로 증명하지 않으면 사회는 차라리 이준석을 선택한다.
실용주의 정치학. 나는 이번 재·보궐 선거 직후에야 진보진영 일각에서 떠들썩하게 MZ세대론을 이야기하는 걸 보면서 쓴웃음을 참을 수 없다. 아니, 그걸 몰랐단 말인가? 이승윤 중앙대 교수처럼 젊고 유능한 연구자들이 이미 각종 데이터로 젠더 갈등의 폭발성을 보여주고 참여소득 등 창의적 제안들을 해왔는데 실천적인 관심들이 많지 않았다. 나는 이준석이 50대 남자들과 TV에서 토론할 때 그의 처방에는 동의하지 않지만 황당해하는 표정에는 공감한다. 왜냐하면 다수의 중장년 논객들은 지금 MZ세대와 기술이 가진 새로움과 복잡성을 진정으로 알려고 노력하지 않으면서 아는 체하기 때문이다. 마치 과거 가상통화 초기 논쟁 때 아는 체하던 유명 진보 논객들처럼 말이다.
권력 정치학. 단지 실용주의 결핍과 계몽주의 과잉보다 더 중요하게는 권력에 대한 간절함이 부족하다. 노무현과 김근태, 그리고 백기완 선생님이 상징했던 진보 정치학은 권력 그 자체보다 권력을 수단으로 모두가 함께 살아가는 인간다운 세상으로 전환하고자 하는 간절함이 핵심이다. 반면에 이준석과 주류 보수진영은 권력 자체에 더 치열한 관심이 있어 보인다. 지금 180석을 가진 이들에게 이 간절함이 부족하면 배고픈 자들의 남녀 분열주의 선동과 프로페셔널리즘이 이긴다.
다음 대선은 개헌이 없다면 이준석 대통령 후보가 이미 예약되어 있다. 아니, 정의당 청년 정치가들 및 이낙연 전 민주당 대표의 제안처럼 대선 후보 자격 완화가 초당적으로 합의된다면 이번 대선에도 출마가 가능하다. 여야 대선 후보들은 손익분기점 계산을 하기보다는 당장 이에 합의하여 본인들이 진정성을 가졌다는 걸 증명하시길 바란다. 나이가 30대이든 70대이든, 제발 계산하지 않는 ‘청년’들이 나와 대선판을 뒤흔들었으면 한다. 비록 그 흔드는 과정의 결말이 우리의 예상과 다를지라도 지금은 흔드는 행위 자체가 선이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앞으로 넷플릭스와 유튜브에서가 아니라 현실에서 ‘빌어먹을 세상 따위’와 ‘머니게임’을 더 많이 보게 될 운명이다. 대학 시절에 글쓰기 수업을 빼먹어 비문으로 가득 찬 칼럼인데도 그간 읽어주신 독자와 아내의 인내심에 감사를 드린다.
경향신문 [ 정동칼럼 ] 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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