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위대한 남자들은 대통령으로 선택되지 않는가
제목을 보고 언짢은 분들에게는 죄송하다. 왜 위대한 사람들이 아니라 굳이 남자들이지? 정치적으로 적절하지 않은 질문인 걸 나도 안다. 사실은 내 질문이 아니라 영국의 귀족인 제임스 브라이스가 근대 미국을 여행한 후 던진 화두이다. 그는 국정운영을 잘하는 대통령의 자질보다 당장 선거에서 승리하기 쉬운 후보를 선호하는 정치과정이란 이유 등에서 그 답을 찾았다.
오늘날 우리는 더 이상 이런 철 지난 질문을 던지지 않는다. 세종대왕이나 이순신 장관은 이제 광화문에서나 뵙는 분이지 21세기 영웅으로 재림할 수 없는 시대이다. 하지만 우리가 위대함이란 부담스러운 단어를 좀 현대적으로 넓게 정의하면 어떨까? 즉 각자 영역에서 도리에 맞게 행동하고 열린 마음을 가꾸며 더 인간다운 미래로 틈새를 열어가는 자라고 말이다. 예를 들어 나에게 위대한 정치가는 바츨라프 하벨 체코 전 대통령이다. 위대한 기업가는 이나모리 가즈오 교세라 창업주다. 위대한 NGO 리더는 마틴 루터 킹 민권운동가다. 위대한 대학 리더는 뉴스쿨 대학원 설립자인 존 듀이 사상가이다. 이들은 모두 생태 우주론과 인간 존엄 가치에 근거하여 부단히 내면 공간과 외부 세계를 성숙시켜나간 ‘전환적 리더’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우리가 이렇게 위대함을 다시 정의한다면 대한민국에서 브라이스가 던진 질문에 대한 답은 무엇일까? 아니 그 전에 왜 위대한 자들 자체가 오늘날에는 잘 떠오르지 않는가 하는 질문이 먼저다. ‘퍼미션 투 댄스’로 우리 영혼을 고양시키는 BTS는 예외이지만 말이다. 내로남불을 부추기는 구조와 윤리 코드 결핍 때문에? 엘리트가 살아남기 어려운 민주주의와 SNS의 과잉 때문에? 혹은 반대로 더 심화된 민주주의 결핍으로 무능한 엘리트들이 주도해서? 아니면 애초부터 깊은 사유를 배제하는 능력주의 시험제도가 야기한 폐해 때문에? 다 일리가 있다. 하지만 보다 더 근저에는 마음의 크기가 작아진 이유에서 비롯된다. 마치 추상적인 도덕 훈계처럼 들린다는 걸 나도 안다. 하지만 최신 과학이론에 근거해 리더십을 연구한 오토 샤머 MIT 교수는 열린 가슴과 마음 정진이 결국 본질이라고 지적한다. 그는 반대로 닫힌 하나의 진리와 정체성만을 고집하는 마음 습속은 파괴와 자기파괴를 반복하는 울타리 속에 우리를 가둔다고 경고한다.
안타깝게도 열린 마음과 의지의 결핍이 제도의 결함 이전에 가장 아쉽게 다가오는 영역이 정치이다. 얼마 전 나는 대선후보들 출마선언을 보다가 잠시 당황했다. 지난 2017년 대선 자료를 잘못 검색한 줄 알았기 때문이다. 그 사이에 기후위기와 불평등이 극도로 악화되고 미·중 ‘신냉전’의 뉴노멀이 등장했는데 후보들의 선언문은 2017년에 출마한 사람들이라 해도 그리 어색하지 않다. 물론 이후 세부 공약에 다 담겨 있겠지만, 출마 선언문 자체가 낡았는데 이후 그들의 로드맵을 믿을 수 있을까?
인류와 한반도의 존립 자체가 의문시되는 대선 역사상 가장 전환적인 시기에 가장 평이하고 구태의연한 대선이 진행되는 이 기이함은 도대체 뭘까? 안타깝게도 이번 대선에는 힘들지만 대선 이후에 구 진보, 구 보수, 미래전환파의 천하삼분지계를 위해 지금 그 씨앗이라도 만들어야 한다. 그리고 모든 후보와 정치가들에게 최소한 4가지 기준에 부응하도록 압박해야 한다. 먼저 미래 틈새를 창출하는 구체적 방안이다. 즉 진영들이 가진 기존 교과서를 넘어 기후위기와 불평등, 미·중 ‘신냉전’ 등 이슈에서 미래로 가는 가능성을 어떻게 실질적으로 만들어 낼 것인가? 불편한 진실을 드러내는 ‘정직한 절망’ 및 실질적 전환 로드맵이 없는 공약은 사기에 가깝다. 둘째로 내로남불을 넘어 각 영역에서 어떻게 보다 단단하게 윤리적 제도와 관습을 구축할 것인가? 나아가 이 윤리가 가장 고통받는 약자(비인간 주체를 포함)들을 중심에 놓을 수 있는가? 셋째로 상대가 아니라 자신이 먼저 어떤 기득권을 포기하고 어떤 더 대담한 모험을 감행할 수 있는가? 넷째로 전환세력의 코어 근육인 MZ 세대에게 말이 아니라 어떤 실질적 주도권을 주고 다양한 세대와 계층이 함께 연대할 것인가?
물론 미래전환파의 세력화가 곧 진보와 보수의 대결을 이제 중지하자는 관념적인 주장을 의미하는 건 아니다. 나는 여전히 스스로 김대중과 노무현, 나아가 김근태와 백기완의 가치를 이어가고 싶은 진보주의자이다. 하지만 진영으로 닫힌 진보가 아니라 미래로 열린 진보이고자 한다. 어쩌면 일부 인사들이 심각하게 오염시켜버린 진보라는 단어 자체와 이제는 결별해야 할지도 모른다. 오히려 미래전환파라는 공통의 플랫폼 위에 서고자 하는 이들이라면 이 판 위에서 다양한 세력들과 생산적인 경쟁과 협력을 전개하고 싶다. 참을 수 없는 가벼움의 시대에 우리는 다시 위대한 착륙을 꿈꾸어야 한다. 왜냐하면 브라이스의 시대에 위대함은 귀족 남자들의 허세이고 오만일 수도 있지만, 오늘날 ‘장기 비상 시대’의 위대함은 곧 안전과 생명의 유용한 매뉴얼이기 때문이다.
중앙일보 [ 중앙시평 ] 7.27
이미지출처 | Prague Morn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