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가 불법인 사람의 자유민주주의

최근 뉴욕타임스 칼럼니스트들이 자신들의 오류에 대해 반성문을 제출했다. 동참하고 싶다. 나는 지난 대선 초반기에 윤석열 후보와 국민의 힘이 ‘약자와의 동행’을 선거 구호로 선택하리라 예상했다. 김종인 전 비대위원장이 이 기조를 선언하는 순간 ‘이재명 후보가 패배하겠구나’하고 성급한 결론을 내렸다. 그들이 그토록 시대 감각과 약자에 둔감한 사람들이라는 걸 과소평가했다. 내가 틀렸다.

공허한 희망이겠지만 지금이라도 약자와의 동행으로 국정 운영 기조를 전환했으면 한다. 그리고 이 노선을 이해하는 인물로 비서실장, 총리 등을 대폭 교체해야 한다. 무엇보다도 대통령의 현 국정 방향에 단호하게 ‘노’ 할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하다. 대개 비서실과 내각의 경제 관료와 검사 출신들은 시대의 흐름을 읽어내고 국정을 성공시킬 가능성을 포착해 대통령을 설득하는 일에 최적화되어 있지 않다. ‘취임덕’이란 씁쓸한 용어가 옥스퍼드 사전에 등재될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

그래도 며칠 전 다행스럽게도 윤석열 행정부의 취임 초반 첫 위기인 대우조선 하청 파업이 ‘종료’되었다. 이제 우리는 기분 좋게 휴가 시즌을 시작한다. 하지만 0.3평의 연옥 속에 스스로를 유폐했던 유최안 대우조선 하청지회 부지회장의 말이 아직도 마음을 불편하게 한다. 대통령에 의해 불법으로 낙인찍힌 소감을 물었던 기자의 질문에 그는 대수롭지 않게 자신의 “존재 자체가 불법이고 차별”이라고 툭 내뱉었다. 최소한 공동체의 구성원이 스스로의 존재를 법 보호 바깥에 내던져진 ‘벌거벗은 생명’으로 간주한다면 대한민국을 자유민주주의 선진국이라고 자랑하는 만용을 멈추어야 한다. 안타깝기는 하지만 자유민주주의는 법치의 원칙을 지켜야 한다고? 글쎄, 내가 아는 자유민주주의는 다르다.

나는 자유민주주의자이다. 즉 법치주의를 소중한 가치로 생각한다. 근대 정치사상의 대부인 마키아벨리는 법치의 주요 목적을 자의적으로 통치하기 쉬운 강자에 대한 견제로 규정한 바 있다. 하지만 대한민국의 법은 반대로 약자에 대한 온갖 견제로 가득 찬 기울어진 운동장이다. 오죽하면 진보주의자가 아닌 이명박 전 대통령도 국무회의에서 북구 유럽의 예를 들며 부자들은 교통 범칙금을 누진적으로 더 내야 한다고 주장할 정도였다(사실이다!). 하청 노동자들은 파업의 정당성을 어렵게 증명해야만 하는 온갖 모호하며 자본 편향적인 사법부의 법 해석 및 잔인한 손배소송과 가압류 등 제약 속에서 쉽게 존재가 불법의 나락으로 떨어진다. 원청의 절반도 안 되는 임금으로 버티면서 불황기의 30% 삭감된 임금을 조금이라도 보전 받겠다는 걸 떼법으로 규정한다면 그건 ‘비문명적’ 사회일 뿐이다.

나는 자유민주주의자이다. 다수의 여론이나 투표로도 결코 박탈할 수 없는 개인의 존엄을 소중히 여긴다. 파업이 종료된 이후 수십억원의 손해배상 청구 소송의 진정한 목적은 파업에 참가하지 못하도록 사전 굴복이고 사후 인간성 파괴라고 생각한다. 이미 우리는 이를 감당하지 못하고 목숨을 끊거나 연옥 속을 살아가는 이들을 너무 많이 보았다. 이게 그 잘난 자유민주주의라면 나는 이 가치를 포기하겠다. 더구나 글로벌 중추국가가 국정목표라면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유일의 반(反)인권 폭력에 무감각한 위선은 도대체 뭐지? 이제 국회가 열렸으니 정당들은 자신들이 진짜 자유민주주의자인지를 그간 묵혀둔 손해배상 소송 금지법(노란 봉투법)으로 증명해야 한다. 자유민주주의의 가치(견제와 균형)를 구현하지 못했던 검찰 개혁이 아니라 이런 거야말로 다수주의로 관철해야 한다.

강압적으로 배제된 건 잠시 사라진 듯 보이지만 반드시 귀환한다. 다단계 하청 구조와 불안정한 경기 사이클 등 누적된 문제의 해결에는 정부를 포함한 모든 이해 당사자의 거버넌스 및 지속가능한 해법이 필요하다. 지금까지의 ‘취임덕’은 사실 전조에 불과하다. 이번 파업이 예고하듯이 이제부터 윤석열 행정부의 진짜 문제해결 능력과 자유민주주의 가치 테스트가 시작되었다. 구조적 저성장 시대에 깊어지는 경제 침체와 차별의 수렁 속에서 향후 몇 년 간 계층, 세대, 지역, 젠더, 국제 관계 등 모든 범주에서 복합 갈등이 마구 분출할 예정이다. 기득권 강자에 대한 견제(법치)와 약자와의 동행(따뜻한 보수) 기조 없이 이를 슬기롭게 넘어갈 수 있을까?

윤석열 대통령은 유최안 부지회장의 병상을 방문해 고마움을 표해야 한다. 도어스테핑에 공허하게 등장하던 자유민주주의 단어를 살아 펄떡이는 언어로 바꾸어 주었기 때문이다. 마치 탄광의 카나리아처럼 향후 어디에서 더 큰 위기가 올지를 고맙게도 경고해주었기 때문이다. 평소에 철창의 작은 틈새 속으로 이글거리던 그의 눈빛을 볼 기회가 없다고 해서 그걸 잊는 순간 우리는 타락하고 공동체는 붕괴한다. 자유민주주의란 평소 잘 보이지 않는 걸 드러낼 때 비로소 건강하게 유지된다. 윤석열 행정부가 약자와의 동행을 선택할지 약자와의 전쟁을 선택할지에 따라 자신들의 향후 운명도 결정될 것이다.



중앙일보 [ 중앙시평 ] 7.26
이미지출처 | 한겨례

Previous
Previous

나는 법무부장관을 존경한다

Next
Next

‘낀 세대’ 당 대표를 꿈꾸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