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둠의 세력’이 패배하는 2023년

나는 휴식을 취할 때면 선이 악을 이기는 드라마를 즐겨본다. 미리 줄거리를 찾아보고 결말이 애매하면 기분이 나빠질까 안 본다. 그때마다 옆에 앉은 아내가 혀를 차곤 한다. 단순한 나와 달리 아내는 스토리가 복잡한 장르를 더 좋아하기 때문이다. 연애 시절 빔 벤더스 감독의 영화 ‘베를린 천사의 시’를 같이 볼 때 잠시 졸았다가 쏟아진 실망의 눈빛을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하지만 더 인간다운 세상을 꿈꾸지만 자주 현실에서 실패해온 나로서는 환상의 세계에서조차 패배하고 싶지 않다. 다행히도 최근 드라마의 트렌드가 나와 같은 이들을 겨냥한 듯하다. ‘재벌 집 막내아들’, ‘슈룹’, ‘천원짜리 변호사’ 등 걸작의 풍년이다. 올해 현실에서는 ‘양복 입은 뱀’들이 승리했지만 이 드라마들에서는 연약한 이들이 착하지만 유능하게 이긴다.

왜 ‘어둠의 세력들’이 그간 몇 년간 갈수록 활개를 치는 세상이 되었을까? 세상이 불확실성과 닫힌 미래의 디스토피아로 변하면 우리의 좌절·분노·불안을 극단으로 밀어붙여 토끼 굴로 몰아넣는 조커들이 신이 나기 때문이다. 인간다운 윤리를 고뇌하는 ‘배트맨’들은 진영 내부에서 총질하는 자이거나 언론 유명세에 목마른 자로 조롱받는다. 브라이언 클라스 교수는 『권력의 심리학』에서 오늘날 이 어둠의 세력을 마키아벨리즘(사실 마키아벨리에 대한 오해이지만), 나르시시즘, 소시오패스라는 3가지 요소로 요약한다. 수단이 목적을 정당화하거나 병적인 자기애, 그리고 양심에 철판을 두른 이들 말이다. 이 세 가지를 완벽하게 장착한 자로 누가 떠오르는가? 나는 한 치도 주저하지 않고 그간 승승장구를 거듭해온 트럼프를 뽑겠다.

이 어둠의 유형들이 소셜 미디어 등의 광기어린 문법을 이용해 최근 줄기차게 성공하는 현실이 자꾸만 나를 넷플릭스 내 상상의 세계로 몰아간다. 그런데 그것도 최근에는 재미가 시들해졌다. 이 광기를 풍자하는 SF 시리즈인 블랙 미러보다 현실에서 벌어지는 ‘대안 현실’들이 더 초현실적이기 때문이다.

우울증에 빠진 나에게 클라스 교수는 걱정 말라고 안도감을 준다. 그에 따르면 이런 ‘어둠의 3 요소’ 유형은 성공하고 나면 그 특유의 충동성, 오만, 극단적 위험 감수 경향으로 스스로 자신을 파괴한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이들은 당선되고 나면 입법 성과가 보잘 것 없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하지만 저자에게 볼멘소리를 하고 싶다. 당신은 그래도 최소한의 원칙과 상식으로 견제가 일부 통하는 나라에서 살지만, 서로 어둠의 3 요소를 사이좋게 공유하며 상부상조하는 대한민국은 어떤 새로운 돌파가 가능할까?

내 질문을 예상한 듯 저자는 모든 권력자에 대한 시민들의 무작위적인 촘촘한 감시를 강조한다. 글쎄, 그래도 트럼프가 사는 미국은 형사 사건에서 무작위로 뽑히는 시민 배심원단이 검찰의 기소 여부를 판단하는 최소한의 장치가 있다. 그리고 독립적인 감찰 조직 등이 중앙과 지방 및 각 영역에서 작동하기도 한다. 검찰 왕국이자, 감사원장이 대선에 나오는 한국에서는 꿈같은 이야기이다. 견제를 해야 할 야권도 검찰 대 경찰, 여당 대 야당 엘리트의 권력 조정에는 관심이 있지만 궁극적으로 어떻게 시민이 통제할 것인가에는 관심이 작다. 나는 수십 년간 노무현과 노회찬을 통해 그간 진보의 핵심 가치는 시민의 공감과 참여, 그리고 엘리트에 대한 통제로 배웠는데 내 교과서가 잘못된 건가?

하지만 냉소주의에 빠진 나를 저자는 책의 마지막 장에서 타이른다. 더 좋은 사람이 우리를 이끌 수 있다는 희망을 버리자 말자고 말이다. 그리고 더 현명하게 채용하고, 무작위로 뽑힌 시민들이 권력자들을 더 감시하는 시스템을 설계하자고 말이다. 그는 지도자들에게 책임의 무게를 상기시키면 사람을 그저 치료대상이나 마약검사 대상으로가 아니라 존엄한 인격으로서 존중하도록 만들 수 있다고 믿는 것 같다.

저자의 낙관에 완전히 동의하기는 어렵지만, 다행히 현실에서 어둠의 3 요소를 갖춘 이들을 흔드는 작은 변화의 물결은 시작됐다. 예를 들어 그 최대의 상징인 트럼프는 연이은 3차례 선거 패배로 마법의 외투가 벗겨지고 있다. 아직은 토끼 굴에 깊숙이 빠진 광기의 집토끼들 덕분에 버티고 있지만 2016년 이래 가장 놀라운 변화다. 이는 진영을 넘어 민주공화국의 가치와 품위를 지키려고 노력한 바이든 행정부와 민주당, 공화당의 일부 용기 있는 자들, 법무부와 법원, 그리고 시민 감시와 참여 노력이 함께 만든 작은 결실이다. 특히 밀레니얼과 Z 세대들이 중간 선거에서 결집하면서 이 ‘어둠의 세력들’에게 올해 마지막 타격을 주었다.

내년은 ‘어둠의 3 요소’ 주인공들이 미국은 물론 한국, 나아가 전 세계에서 결정적으로 약화하는 전환기가 됐으면 좋겠다. 현실에서는 비록 연약하지만 착하고 유능한 세력이 단순하게 이기고, 드라마에서는 좀 더 복잡한 플롯의 이야기를 즐기는 한 해를 같이 만들어 가길 절실히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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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든이 필요한 민주당과 정의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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