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아용인'으로 반전 이룬 이준석

역시 이준석의 시간은 뭔가 달랐다. 그는 마치 영화 ‘머니볼’의 비주류 구단주처럼 ‘천아용인’이란 도전자 브랜드팀을 선보이며 국민의힘 전당대회를 한순간에 뒤흔들었다. 천하람 당대표 후보와 허은아·김용태 최고위원 후보, 이기인 청년최고위원 후보의 이름 중 한 글자씩 따서 만든 신조어다. 이들은 친윤계 주류 현역 의원 3명을 탈락시키며 1차 컷오프를 거뜬히 통과했다. 이준석 전 국민의힘 대표가 즐기는 삼국지 비유를 들자면 김기현 대 안철수 양강 대결 국면을 순식간에 천하 삼분지계 구도로 바꿨다.

흔히 언론에선 이들을 ‘이준석계’라고 부른다. 하지만 천 후보는 이를 거부하고 자신들을 ‘정파’라고 선언했다. 단순한 인적 결사체가 아니라 당 개혁이란 공통 어젠다를 추구하는 정치 노선 그룹이라면서다. 과거 한나라당 시절 ‘남원정(남경필·원희룡·정병국)’ 이후 드디어 오랜만에 보수 정당 내에 ‘청년 정파’가 등장한 셈이다.

이 전 대표는 첫 당대표 후보 TV 토론이 열린 지난 15일 라디오 방송에 출연해 “이젠 이준석의 시간이 끝나고 천하람의 시간이 시작됐다”고 말했다. 평소 청년 정치에 관심을 기울여 온 송주환 아이브 대표는 이를 이 전 대표 특유의 ‘인정 투쟁’이라고 진단했다. 대선과 지방선거 승리의 일등 공신으로 인정받긴커녕 박해만 받아온 자신의 한을 새로운 구단의 화려한 무대 데뷔를 통해 조금이나마 풀은 것이란 분석이다.

물론 이번 1단계 성공은 이준석 개인의 인정 투쟁이란 의미를 넘어선다. 더 나아가 청년 우파의 넥스트 어젠다와 활동 방식으로 무장한 밀레니얼 정치 세력이 보수 진영에 본격적으로 등장했다는 신호이기도 하다. 이전까진 이 전 대표가 단기필마로 새로운 세력을 형성해 나갔다면 이젠 하나의 정치 블록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는 뜻이다. 일관된 가치보다는 핍박받는 마이너리티 감수성으로 뭉친 이들이 동원하는 가치 도구는 우파 포퓰리즘과 능력주의다. 이들은 스스로를 반기득권으로 규정짓고 기존의 여야 정치권 주류와 전투적으로 싸우고자 한다. 위계적 권력에 줄 서는 이들과 맞서 상향식 공천 개혁과 자격시험 등을 내세우며 공정성의 레토릭 또한 동원하고 있다.

향후 전당대회 최종 성적표와는 무관하게 이준석 정파는 이 싸움에서 이미 주도권을 거머쥔 모양새다. 두 가지 이유에서 그렇다. 첫째, 윤석열 대통령이 자유의 가치를 빈번하게 외치고 있지만 천아용인 정파와 달리 윤 대통령이 간과하는 게 하나 있다. 대한민국 민심은 때로는 강한 자보다 옳은 자의 손을 들어준다는 사실이다. 아무리 진영으로 갈라지고 힘이 지배해도 대한민국은 자의적 통치와 ‘명예 당대표’에 대한 견제 심리가 강한 자유주의 국가다.

동시에 평등주의 또한 강한 반기득권의 나라, 즉 포퓰리즘의 나라이기도 하다. 실제로 보수 진영이 진보 진영을 상대로 가장 효과를 본 메시지도 바로 ‘강남좌파론’이지 않았나. 현실이 이렇다 보니 포퓰리즘 구사에 약한 유승민 전 의원과 안철수 후보에 비해 기성 권력에 거침없이 도전하는 이 전 대표가 주류 보수 세력에겐 훨씬 더 큰 위협이 될 수밖에 없다.

둘째, 오늘날 ‘B급 전술’을 구사하는 이들로 가득한 한국 정치에서 걸출한 전략가들은 모습을 감춘 지 오래다. 윤여준·김종인·박철언 등 중량급 정치인들이 사라진 뒤 이 전 대표가 차세대 보수 전략가로 떠오르며 정가의 주목을 모은 것도 이 같은 정치 현실과 무관치 않다. 어찌 보면 그에게 B급과의 전투는 싱거운 게임이었을 수 있다. 그는 당원권이 정지된 뒤에도 침착하게 반격을 준비해 왔고, 청년 당원 배가 운동을 벌이며 때를 기다리다 전광석화처럼 천아용인 카드를 내놓으며 반전을 이끌어냈다.

다만 특유의 나르시시즘이 영민함을 뒤덮는 이 전 대표의 치명적 단점은 여전해 보인다. 이번에도 당대표 TV 토론 때 천 후보가 던져야 하는 질문들을 미리 방송에서 자랑하듯 떠드는 모습은 그리 현명해 보이지 않는다. 이제부터는 이 전 대표가 아닌 천하람과 최고위원 후보들의 시간임을 명심할 필요가 있다.

2단계 성공 여부는 아직 불투명하다. TV 토론은 기대치 게임이다. 하지만 천 후보는 이 전 대표가 예고 방송을 통해 띄운 기대치를 채우지 못했다. 윤핵관 공격이란 예상된 소재를 예상된 방식으로 공격하는 수준을 넘지 못했다. 노회하게 피해 가는 김기현 후보나 모호한 화법의 안 후보 앞에서 그저 패기 넘치는 청년 후보라는 이미지를 넘어서지 못했다. 이 전 대표가 그 자리에 있었다면 ‘결정적 순간(Defining Moment)’을 수차례 만들었을 것이란 평가가 나오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천 후보는 과연 앞으로 2주간 진행될 TV 토론과 합동 연설회에서 달라진 모습을 보일 수 있을까. 천 후보는 “이 전 대표가 마라탕이라면 나는 짜장면”이란 비유를 들며 안정감과 포용력 있는 모습을 부각시키려 하고 있다. 하지만 이번 전대에서 의미 있는 결과를 얻기 위해서는 본인만의 차별화된 모습에 대한 이 같은 강박과 원팀 정신 사이에서 쉽지 않은 방정식을 풀어가야 하는 상황이다.

향후 이준석 정파 앞엔 두 갈래 길이 기다리고 있다. 하나는 이 전 대표가 ‘자극적 트럼피즘’을 내세웠던 것처럼 또 다른 네거티브와 혼돈의 대리인이 되는 길이다. 또 하나는 ‘이준석 스타일’ 본래의 장점을 살려내는 길이다. 이 전 대표가 2년 전 당대표 후보 때 대구에서 한 연설은 버락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의 공화주의적 가치와 공존 화두를 한국 보수의 미래 비전에 제대로 접목시켰다는 점에서 높은 평가를 받았다. 천아용인도 이처럼 절제된 ‘대구의 이준석’을 발전시켜 나가야 더 큰 확장성을 기대할 수 있다.

이준석 정파의 2단계 성공 여부와 무관하게 작은 나비의 날갯짓은 향후 한국 정치에 다양한 파장을 불러일으킬 전망이다. 일부 청년 남성층에 강력한 영향력을 가진 이준석 정파를 포용하지 않고 한국의 보수가 총선과 대선에서 이기기는 현실적으로 쉽지 않아 보인다. 이른바 ‘윤핵관’ 그룹의 곤혹스러움도 바로 여기에 있다.

날갯짓의 자장이 더불어민주당과 정의당까지 확산될 경우 파장은 더욱 커질 것이다. 당장 박지현 전 민주당 비대위원장이 천 후보에게 보낸 우호적 메시지는 의미심장하다. 만약 이들이 젠더 갈등과 대립을 잠시 멈추고 반기득권 연합 전선을 펼치면 곧바로 정계개편으로 이어질 가능성도 크다. 관건은 과연 이준석 정파에 이런 시야와 정치력이 있을 것이냐다. 당장 박 전 위원장의 응원에 싸늘하게 답하는 천 후보의 모습엔 기존 이준석 스타일의 그림자가 어른거린다. 이제 18일 뒤면 이들이 그동안 수면 아래서 얼마나 내공을 다져 왔는지 드러날 것이다. 그리고 이준석계가 이준석 ‘정파’로 나아갈 수 있을지도 그때 가늠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중앙선데이 | [여의도 톺아보기] 2023.02.18
이미지 출처 | 헤럴드 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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