퀀텀 리더십

나의 MBTI(INFJ)와 사주는 신기하게도 둘 다 내가 미래 트렌드에 관심이 많다고 알려준다. 그래서인지 새해 첫 칼럼 주제를 양자역학과 넥스트 리더십으로 정했다. 아니, 물리학의 미시 세계 작동 원리를 왜 거시 세계인 인간 리더십에 갖다 붙이는가? 아무리 비유라도 말이다.

아니, 비유를 하려는 게 아니다. 그간 몇 년간 전 세계 과학계는 아직 논쟁의 여지는 있지만 원자라는 미시 영역을 넘어 인간의 뇌와 마음 및 조류의 이동 등 소위 양자 생물학 영역에서 눈부신 성과를 만들어 내고 있다. 이미 오래 전 데이비드 봄이란 양자 물리학의 거장은 고전 물리학 세계관의 나와 너를 별개로 분리하는 사고방식과 타자에 대한 차별이 무관하지 않음을 간파한 바 있다.

오늘날은 경영학, 경제학은 물론이고 가장 무관해 보이는 페미니즘 및 정치학에서도 활발한 연구가 진행 중이다. 한국에서도 이에 관심이 큰 국제정치학회 전재성 전 회장은 이 분야 선도자인 알렉산더 웬트 교수를 초청해 흥미로운 토론을 나누었다.

나도 몇 년째 경희대에서 퀀텀 리더십을 가르치고 있다. 내가 속한 경희 공동체 자체가 설립 때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이 경이로운 세계관에 관심이 많다. 처음엔 강의 제목에 두통을 일으키던 학생들도 나의 물리학에 대한 무지를 곧 깨닫고는 슬며시 웃는다. 역시 무식한 자는 용감하다.

이 퀀텀 리더십의 특징은 과거 전통적인 근대 리더십의 결정론적이고 경직된 모든 이분법을 넘어선다. 나아가 불확실성에 열려있고 사건을 만들어 내는 마음의 파동과 역동적 관계의 상호 얽힘에 주목한다. 아니, 이건 이미 오래 전부터 불교와 노장 사상, 혹은 수피즘(이슬람 신비주의) 등이 이야기해온 거 아닌가? 물론이다. 다만 첨단 과학과 결합하면서 새로운 글로벌 르네상스를 만들어 가고 있다. 사실은 인간의 마음, 바이러스의 생명력, 백신 기술 등의 무수한 현상이 얽힌 걸 잘 보여주는 팬데믹 시대에 우리 모두는 양자 철학자이다.

하지만 양자와 바이러스의 가르침에도 불구하고 인간 공동체는 오히려 근대로 퇴행하고 있기도 하다. 심지어 근대 시기에도 하벨 전 체코 대통령처럼 양자 물리학을 리더십에 연결하려고 한 선각자들이 있었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양자 보안 기술을 활용한 스마트폰과 컴퓨터까지 현실화한 오늘날 오히려 근대 이분법이 더 유행이다. ‘선 vs 악’의 부족주의 말이다.

양자 기술 연구의 양대 산맥인 미국과 중국의 정치 엘리트들은 정작 이 과학의 경이로운 함의에는 관심이 없고 ‘너 어느 진영이야’의 ‘신냉전’ 게임에만 집착한다. 왜냐하면 미국은 아직 각 인간이 타자로부터 독립해 자율적으로 존재한다는 비과학적인 자유주의 환상이 지배하는 나라이기 때문이다. 또한 중국은 각 인간이 고유의  존엄성을 가지는 존재임을 이해하지 못하는 권위주의 망상이 지배하는 나라이기 때문이다. 비록 자유주의는 이 권위주의보다는 낫지만 크게 보면 근대 세계에 머물러 있다. 그럼 우리는?

다행히 지난해 정부는 양자 기술 연구개발 전략을 확정했다. 아직 투자 규모가 작지만 그래도 만시지탄이다. 그런데 정작 그 기술이 바탕으로 하는 세계관이 아니라 부족주의가 전례 없이 횡행한다. 민주당 다수는 타자와 얽혀 살아가는 세상을 인정하는 차별금지법에 무관심하기에 미국식 자유주의조차도 제대로 실행하지 못했다. 국민의힘은 자유주의로의 진화는커녕 아직 여성 차별의 마초주의와 ‘윤핵관’ 연고주의가 지배한다. 하버드에서 과거에 어떤 코스를 선택했는지는 모르지만 이준석 대표는 이제 페미니즘이 심지어 양자역학과 만나는(소위 신유물론 페미니즘) 미래로의 눈부신 여정을 알고는 있을까?

하지만 시대의 연습문제를 잘 못 푸는 정치인들이 아니라 출제자인 우리가 문제의 근원인지도 모른다. 모두가 쉽게 비난하는 정치권은 사실은 기업, 교육계, 시민들이 가지는 낡은 가치와 결코 떨어져 섬처럼 존재하지 않는다. 삼성은 기술의 미래 트렌드를 보여주는 이번 CES에서 ‘미래를 위한 동행’을 전면에 내걸었다. 멋지다. 하지만 과연 삼성과 한국 대표 기업들이 탈근대적 양자 리더십까지는 아니라도 국내외 시민, 소비자, 노조, 공급망, 지구행성 등 다양한 이해관계자가 동행하는 근대적 이사회라도 잘 구현하고 있을까?

과연 대학 및 각급 교육기관 리더들은 AI 기술 교육 이전에 양자적 얽힘의 세계관과 ‘타자’를 사랑하고 동행하는 법을 배우는 공간을 만들고 있을까? 개별 시민으로서 나는 자유로운 독립적 남성이라는 환상으로부터 얼마나 떨어져 실천하고 있을까? 글쎄, 자신이 없다. 대한민국이 양자 컴퓨터와 양자 암호의 선진국이 되는 것도 중요하지만 양자적 가치의 넥스트 리더십을 모든 영역에서 만들어가는 게 훨씬 더 중요하다. ‘수포자’인 나로서는 심오한 진리 연구에 헌신하는 과학자들에게 새해 존경의 인사를 드리고 싶다. 콜드플레이의 ‘과학자’ 노래처럼 과학과 사랑의 관계에 대해 생각하게 되는 새해 초이다.

중앙일보 [ 중앙시평 ] 1.11
이미지출처 | BB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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