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 트럼피즘이 상륙한 한국

유령이 한국을 배회하고 있다. 샤머니즘과 트럼피즘(=샤피즘?) 유령이. 윤석열 부인인 김건희씨는 마치 신내림을 받은 샤먼처럼 자신 부부의 영적 재능을 강조한다. 이준석 대표는 마치 트럼프의 버릇없는 청년 뉴요커 시절처럼 이대남의 분노를 제물로 차기 대선후보에 가까워지고 있다. 전근대 샤머니즘과 탈근대 트럼피즘이 공존할 수 있을까? 그렇다. 의식연구의 아인슈타인으로 불리는 켄 윌버는 인간이 갖는 초월성을 인정하는 이들이 동시에 여성차별주의와 권위주의 신봉자일 수 있다고 지적한 바 있다. ‘영성 트럼피즘’이라고나 할까.

애초에 내가 윤석열과 이준석 현상을 과소평가하지 말라고 경고했을 때 진보 진영 일각에서 비웃은 바 있다. 그들은 왜 과거 낭만적인 ‘겨울연가’를 수출했던 나라가 이제 섬뜩한 ‘지옥’과 ‘지금 우리 학교는’을 수출하는지 모른다. 아니 사실은 나야말로 그 무지의 선구자이다. 2015년 경희대에서는 학생들에게 향후 원하는 스승의 상을 물었다. 훌륭한 학술 지식이나 강의 역량 보유자라는 답을 예상한 나의 생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가장 많은 학생들은 정신적 스승을 절실히 원하고 있었다. 아뿔싸, 나 같은 미국 유학파들이 공부한 적이 없는 분야 아닌가. 도대체 그간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었던 걸까?

원래 인간의 초월에 대한 요구는 두 가지 형태를 띤다. 하나는 과학에 근거하면서도 경이로운 세계로의 초월이다. 과학이 제공하는 우주 진화론 성과를 수용하면서도 다가올 생태 문명은 곧 샤먼의 시대라고 예고한 토마스 배리 문명비평가는 이를 대표한다. 하지만 동시에 그간 근대 과학이 이룬 성취에 무관심한 신비주의 초월이 있다. 사실은 초월을 빙자한 탈 진실과 나르시즘에 가깝다. 위대한 백인 마초 문명을 욕망하는 트럼프와 그의 핵심 관계자(트핵관)인 스티브 배넌의 신흥 샤머니즘은 비틀린 영성의 전형적인 예이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디스토피아 시대의 불확실성, 불안정, 그리고 대담한 전환의 불가능성 앞에서 우리 내면은 겨울연가의 북극성보다는 지옥의 불길에 더 끌린다. 아니 ‘겨울연가’나 ‘옷소매 붉은 끝동’의 연인들처럼 가성비가 좋지 않은 사랑을 할 시간에 ‘삼전’ 주식 시세를 한 번 더 들여다보는 게 낫지 않을까? 아니면 김건희와 이준석의 입을 지켜보거나.

영성 트럼피즘에 대한 미국 민주당 586과 그 후계자, 제3지대, 그리고 좌파의 반격은 모두 무기력했다. 어린 시절 ‘비천하게’ 자란 빌 클린턴의 자기 생존을 앞세운 실용주의는 결국 시장 전체주의를 완성하고 의도하지 않게 트럼프의 길을 닦았다. 여성 괴물론에 수십 년간 고통스럽게 시달린 힐러리는 영성의 통합 정치를 추구하다 ‘맨스플레인’(가르치려드는 남자)하는 진보 미디어 매체에서 조롱을 당했다. 결국 그녀는 마초 전사로 갑옷을 둘렀지만 이후 더 ‘여성적인’ 오바마에게 무너졌다. 제3지대 IT 기업가 로스 페로는 중도 실용주의와 보호주의로 트럼프 등장을 예고했다. ‘어메이징 그레이스’를 불렀지만 실제로는 약자들의 삶과 지위를 크게 개선하지 못한 오바마(586의 후계자)는 트럼프가 백악관을 차지하는 걸 속절없이 지켜보아야만 했다. 좌파 샌더스는 트럼프 지지 노동자들을 계급적으로 공감하긴 했지만 그들의 반(反) 여성주의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목소리가 약했다. 바이든의 추락을 틈타 이제 다시 영성 트럼피즘 좀비가 부활하고 있다.

우리는 민주주의 방역에 실패한 미국과 달리 과연 백신을 발명할 수 있을까? 루스벨트 진보주의 시기도 맛보지 못한 채 정부 신뢰 퇴색과 저성장 속에서 부자들의 소비 진작에 의존해야만 하는 씁쓸한 현실에서 말이다. 힐러리의 중산층 페미니즘조차 시도하지도 못한 채로 그 단어가 검열의 대상이 되는 안타까운 현실에서 말이다. 전 근대적 거버넌스를 가진 기업이 RE100과 친환경의 미래를 우리에게 가르치려고 하는 기이한 현실에서 말이다.

윤석열은 처음에 합리적 보수주의 길과 우연히 만났다가 지금은 어느 정도 샤피즘 길로 접어든 모양새다. 최근 ‘윤식당’은 반(反) 이민주의와 중국 때리기의 트럼피즘 단골 메뉴까지 내놓았다. 이재명은 빌 클린턴처럼 가치가 약한 실용주의, 생존주의나 샌더스처럼 이대남에 대한 공감으로 이 샤피즘에 맞대응해 성공할까? 한국의 로스 페로인 안철수는 독자 세력의 길과 다양한 정치연합 경로 사이에서 어떤 선택을 할까? 심상정처럼 샌더스의 공간을 이재명에게 일부 빼앗기고 존재 이유가 퇴색된 좌파의 새로운 출구는?(근데 미국 일부 평론가들이 이재명을 한국의 샌더스에 비유하는 건 정말 좌파 샌더스도 실용주의자 이재명도 모른다는 걸 증명한다.) 불길하게도 현재까지 우리는 영성 트럼피즘을 키운 미국의 앞선 실패를 닮아가고 있다. 그들과 달리 우리는 더 정의로운 분배와 이성에 기초하면서도 모든 취약한 존재(인간과 비인간)에 대한 사랑의 정치를 통합해낼 수 있을까? 각자도생과 기후파국 시대에 더 나은 미래를 꿈꾸는 세력은 소확행 정책 이전에 먼저 인간다운 가치와 영성의 목소리가 되어야한다.

중앙일보 [ 중앙시평 ]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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