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성숙한 아저씨들의 크리스마스
올해는 내 인생에서 가장 슬픈 한 해였다. 병원에 가면 의사가 진료할 생각은 안하고 몸 좋다고 부러워하던 아버지가 예상치 못하게 돌아가셨기 때문이다. 단 한 번도 내 앞에서 칭찬을 해주신 적이 없는 아버지는 언제나 엄하고, 어색하고, 그러나 존경스러운 분이셨다. 심지어 내 전공인 미국 대통령제도 당신이 더 잘 안다고 가르치려고 하셨으니, 나 원 참. 나는 제왕의 권위를 가졌던 아버지를 보내고 나서야 내 안의 소년이 성장하기 시작하는 걸 느낀다. 어이없게도 흰머리가 희끗한 아저씨의 나이에 말이다.
나는 성숙한 성인으로 성장할 기회가 적었던 소년·소녀들이 스스로를 엘리트라고 착각하는 현상이 한국 사회(더 거창하게는 현대 문명)의 고질병이라 생각한다. 내년 3월에는 이재명과 윤석열, 두 남자 중 한 분이 ‘왕좌’에 오른다. 정치학자로서 둘 중 누가 더 나은지에 대한 나의 선호는 있지만 정신분석학자인 칼 융의 관점에서만 보면 둘 다 덩치 큰 소년들이다. 이재명은 나로서는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는 처절한 소년공의 삶 속에서 형성된 공격성과 승리주의로 무장한 소년 전사이다. 차별금지법 제정을 간절히 호소하는 운동가들에게 싸늘한 말을 툭 내뱉다가도 며칠 후 다시 태연하게 차별금지법의 필요성을 선동한다. 윤석열은 이 세상을 형님 아니면 아우, 혹은 센 놈 아니면 이를 잡는 자로 명확하게 구분하는 또 다른 소년 전사이다. 제 3지대에 있는 남자들은 이 전사들보다는 좀 더 귀엽지만 너무 자신과 사랑에 빠진 소년들이다.
굳이 엘리트라 자칭하는 모든 소년들에게 올해 출간된 로버트 무어와 더글라스 질레트의 『왕, 전사, 마법사, 연인』을 강추한다. 이 책은 융의 관점에서 남성들에게 존재하는 4가지 심리 원형이 어떻게 때로는 좋은 방식으로, 때로는 비틀리게 결합하는지를 보여준다. 저자들이 보기에 왕의 유형이란 통합적 질서와 적절한 인재를 배치하는 자이다. 타락하면 폭군이나 반대로 나약한 통치자가 된다. 전사란 위기를 돌파하는 공격력을 가지고 초월적으로 헌신하는 자이다. 타락하면 폭력을 행사하거나 당하는 걸 즐기는 자가 된다. 마법사는 세상의 이치를 아는 현자이다. 타락하면 사기꾼이나 순진한 척하는 자가 된다. 마지막으로 연인이란 공감의 감수성을 가진 사랑스러운 자이다. 타락하면 채워질 수 없는 쾌락에 중독되거나 무기력증에 빠진다. 이 저자들의 관점에서 보면 내년 이재명, 혹은 윤석열 대통령은 전사의 유형이다. 안타까운 점은 둘 다 나머지 3가지 원형과 잘 조화된 균형감이 다소 모자란다는 점이다.
왜 오늘날까지 우리는 역대 대통령 중 김대중을 가장 탁월한 리더로 평가할까? 단지 준비된 대통령이었기 때문에? 나는 정책 이전에 그의 균형 잡힌 4가지 심리 원형에 주목하고 싶다. 낙후된 재벌체제와 고삐 풀린 시장주의의 결합으로 IMF(국제통화기금) 위기가 왔을 때 그는 지적으로 판단하고 결단력 있게 질서를 부여하면서도 실업자들의 아픔에 공감했다. 그가 집권 말기 오락가락하고 경기부양에 집착했던 시기는 이 4가지 균형이 무너졌을 때이다.
내년 누가 당선되건 향후 몇 년간 한국 정치는 혼돈의 이행기가 예정되어 있다. 오직 4지선다형 오징어 게임에서 승리해야만 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내면세계가 자랄 기회가 없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이제 페이스북의 세상에서 우리는 마음 근육이 더욱 쪼그라들거나 반대로 약물로 팽창했다.
이제 한 해가 저문다. 과거에는 크리스마스가 다가오면 나는 ‘나 홀로 집에’를 마치 의식을 치르듯 시청하곤 했다. 아빠의 스킨로션을 발라보다가 따가워 비명을 지르는 맥컬리 컬킨은 내 안의 소년(얼굴 말고)과 닮았다. 하지만 올해 크리스마스에는 이 영화 대신에 나의 절친이 가장 좋아하는 영화인 ‘8월의 크리스마스’를 보고 싶다. 나에게 이 영화는 단지 시한부로 죽어가는 아저씨와 생명력으로 빛나는 아가씨의 로맨스 영화가 아니다. 융의 관점에서 보면 취약하고 어린 소년에서 강하고 성숙한 남자로의 성장 영화이다. 몇 년 전 히트작인 ‘나의 아저씨’ 드라마나 올해 최고의 걸작 SF 영화인 ‘듄’도 모두 어른이 되지 못한 남성들을 위한 심리 영화이다.
왕이 되고 싶은 소년들이 정치, 기업 등 모든 영역에서 벌이는 왕좌의 게임은 위드 코로나처럼 오래갈 예정이다. 어떤 소녀 정치인은 연일 페이스북에서 이 소년들을 흉내 내며 남성성을 뽐낸다. 그리고 벌써 몇 년 후 대통령이나 책임 총리 후보로 또 다른 미성숙한 소년들이 예약되어 있다. 그 소년 중 하나가 제안한 공직 후보자 자격시험은 문제의 본질을 왜곡한다. 정작 더 나은 대한민국을 위해 필요한 고민은 어떻게 이 소년, 소녀들에게 시험 문제 출제 대신에 성년의식을 부여할 수 있을지 여부이다. 심은하가 열연한 ‘8월의 크리스마스’의 주차단속원 다림의 출현을 기다려야하는 걸까? 올 한 해 사랑을 간직한 채 글을 쓸 기회를 새로이 주신 독자들에게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내년에는 더 성숙한 글쓰기로 찾아뵙겠다.
중앙일보 [ 중앙시평 ] 12.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