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대 국회에 바라는 ‘대담한 반란’
미안한 말이지만 향후 4년을 책임질 새 국회는 이미 시작하기도 전에 실패하고 있다. 왜 투표 잉크도 마르기 전에 나는 벌써 비관주의에 빠질까? 대한민국 국회는 상원과 하원이 역할을 나눈 미국과 다르다. 세가지의 험난한 역할을 모두 단원제 내에서 수행해야 하는 미션 임파서블의 기관이다. 세가지란 예리한 분노, 합리적 지성주의, 미래 예방 행동이다. 유감스럽게도 새로이 구성될 국회에는 세가지의 역할 모델을 수행할 인물들이 너무 적다.
예리한 분노, 노무현과 노회찬 모델.
군사독재의 후안무치함에 분노하며 명패를 던진 노무현 의원이 그립다. 천민 재벌 행태를 고집하는 이들에게 송곳 질문을 던진 노회찬 의원도 보고 싶다. 하지만 더 많은 노무현, 더 많은 노회찬의 정의로운 분노보다는 정치공학 계산에만 몰두하는 이들이 21대 국회에 너무 많을 것 같다. 난 아직도 조국 사태를 유무죄 여부의 문제로만 사고하는 이들을 보면 안타깝다. 만약 초기에 비윤리적 문제를 인정해 전광석화처럼 사퇴시키고 촛불 연합을 확대했으면 어땠을까? 수구 진영이 지금보다 더 확실히 궤멸하고 미래지향적 진보와 개혁적 보수의 실력 경쟁의 새 장이 조금은 더 열리지 않았을까? 그렇다면 진짜 윤리 문제를 가지고 끝까지 가볼 수 있었을 텐데. 코로나나 기후위기가 터지면 누구보다 일찍 참혹함을 당해야 하는 장애인, 노약자, 가난한 자 외면의 윤리 말이다. 소라넷 사건 이후 일부 의원들과 NGO 운동가들의 절규에도 불구하고 태연히 잠이 든 윤리 부재 말이다. 고공에 올라가 있는 노동자를 일회용 티슈인 양 외면하는 기업 윤리의 무감각증 말이다. 과연 정치와 도덕은 다른 거라고 천연덕스럽게 주장하거나 쉽게 말을 바꾸는 이들이 이 ‘실천 도덕의 정치’에 자신의 모든 걸 걸고 싸울 수 있을까? 조국 아니면 대한민국에서 법무장관 할 사람이 절대 없다고 핏대 올리던 이들은 지금 추미애 장관에겐 왜 그렇게 만족하는지 난 참 궁금하다. 21대에는 누가 바보 노무현과 송곳 노회찬의 역할을 할 수 있을까?
합리적 지성주의, 원혜영 모델.
우리는 이제 아쉽게도 원혜영, 금태섭, 채이배 등의 얼굴을 여의도에서 보지 못한다. 비록 나는 이들의 정치노선과 이견도 많지만 정치에 대한 건전한 상식과 지성주의적 접근법을 존경한다. 이들은 상원제도가 있었다면 수십 년간 여의도에서 초당적인 역할을 수행할 인물들이다. 진보는 전투적인 분노를 가져야 하지만 동시에 통합적일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약자들의 삶을 1㎜라도 진전시키려면 원칙이 훼손되지 않는 한 불완전한 이들과도 손을 잡아 법안을 통과시켜야 하기 때문이다. 전투적 진보주의자 코르테스가 사안에 따라서는 극우 루비오에게 손을 내미는 게 바로 진보이다. 극단적 진영대결의 국회가 개막할 텐데 누가 원혜영의 큰 공백을 메울 수 있을까?
미래 예방의 행동주의, 정은경 모델.
메르스 재난 이후 무관심과 굴욕, 악화된 건강 속에서도 노무현 대통령이 만든 질병관리본부를 훌륭하게 진화시켜간 정은경 말이다. 하지만 복합 재난의 미래 예방에서 주도적 역할을 할 미래 주체들이 새 의회에는 너무 적게 진출한다. 지난 칼럼에서 한국의 코르테스라고 부른 장혜영 정의당 비례 후보 등이 당장 n번방 원 포인트 국회 열기 캠페인을 벌인 바 있다. 함께 연대한 여러 소수당과 달리 당시 민주당의 여성, 청년후보들 응답이 없는 것을 보면서 씁쓸한 기분이 들었다. 세상에, 현재 행동하지 않는 이가 미래주체라고 할 수 있을까? 정은경과 의사들이 외롭게 대비했던 감염병처럼 기후파국에 대비하는 ‘녹색 정은경’도 새 국회에서 너무나 소수이다. 4년 후 기후파국이 더 악화되었을 때 우리는 기후악당 국가라는 오명을 벗어던질 수 있을까?
이번 코로나19 대응 과정에서 한국은 세계가 주목하는 새로운 자유주의 모델로 부상했다. 이런 귀중한 기회에 정작 4년간 한국은 좀비처럼 부활하는 수구세력과의 싸움과 무조건적인 진영 옹호 속에서 망가질까 걱정스럽다. 물론 일일이 거명할 수는 없지만 그간 위 세가지에서 훌륭한 역할을 수행하는 좋은 분들이 아직은 국회에 적지 않다. 이들이 제발 험지에서 생환해서 닥터 둠인 나의 비관주의를 보기 좋게 박살내 주길 기원한다. 그러려면 우선 반란자의 초심으로 돌아갔으면 한다. 그들의 첫 행보는 설레는 마음으로 국회로 들어가는 게 아니다. 오히려 국회 밖으로 걸어 나와 혁명가의 태도로 다시 걸어 들어가는 것이다. 오직 대담한 반란만이 역설적이게도 21대 국회를 생산적으로 전환시킨다. 로마클럽의 표현처럼 비상 상황(emergency)은 새로운 것을 출현(emergence)시킨다.
경향신문 [정동칼럼] 2020년 4월 1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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