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오른 한국형 뉴딜과 정계개편

 

세상이 뒤집어졌다. 이제 한국에서도 누구나 루스벨트의 뉴딜을 이야기한다. 하지만 모두가 민주주의자 행세를 할 때가 민주주의가 가장 위기에 빠졌을 때라는 걸 기억할 필요가 있다. 한국형 뉴딜을 이야기하려면 최소한 다음의 3가지를 인식하고 있는지 돌아볼 필요가 있다.

첫째, ‘급진적’ 생태 뉴딜주의자 루스벨트에게는 생태보전이 최대 목표이고 경제 회복은 2차 목표에 불과했다.


그럼 문재인 대통령은? 당시 토건과 성장주의 시대 기준으로만 보면 루스벨트는 미국 역대 어느 대통령도 감히 따라올 수 없는 열렬한 생태보전주의자였고 이를 위한 규제 강화론자였다. 오죽하면 경제 대공황의 한복판에서도 그의 국내 1순위 어젠다가 생태보전이었다. 그리고 그간 미국 학계에서 다소 저평가된 ‘시민 환경 보전단’ 등을 통해 7년간 300만의 청년 일자리를 창출했다. 루스벨트보다 더 비타협적 ‘생태 전사’인 해롤드 이키스 핵심 참모는 수시로 본인의 사직을 내세워 루스벨트를 압박했다. 앞서간 생태철학자의 면모를 지닌 엘리노어 루스벨트와 이키스 등 백악관의 멋진 팀워크가 생태 친화적이면서도 경제적 풍요를 이룬 뉴딜을 성취해냈다.

지금 청와대와 민주당이 뉴딜을 이야기하려면 최소한 그 정도 담대한 목표와 결기가 있어야 한다. 디지털과 경제회복은 더 인간답고 품위 있는 삶과 다가올 생태 파국 방지를 위한 수단이지 그 역이 아니다. ‘생명의 정치’를 위한 절체절명의 순간, 그게 코로나19 사태의 교훈 아닌가? 자연을 가슴 속 깊이 사랑하는 문재인 대통령이기에 진정한 뉴딜의 정수를 제기하길 기대한다.


둘째, 진보 시대를 열어간 루스벨트는 사실은 이재명과 이낙연의 두 얼굴을 동시에 가지고 있었다.


그럼 문재인 대통령은? 루스벨트는 이재명 지사와 같은 실용주의적 진보의 DNA가 강한 사람이다. 관념적 진보가 아니라 구체적 현실에서 작동하는 진보 말이다. 그리고 둘 다 노무현 전 대통령처럼 기득권에 정면 도전한 좋은 의미의 ‘포퓰리스트’이기도 하다. 하지만 루스벨트는 귀족적 출신답게 안정론자이기도 하다. 이낙연 의원 같은 탁월한 관리형 리더이기도 하다는 뜻이다. 잠시 확장적 재정 정책을 펼치다가 곧 균형 예산으로 돌아가 경기 불황을 노정해야 했던 그 소심한 루스벨트이니 말이다. 문재인 대통령과 정당들은 이제 선택해야 한다. 사회적 약자와 강자 사이의 극단적 불평등을 담대하게 재조정할 것이냐 아니면 일부 안전망의 확대 정도이냐 말이다. 만약 전자를 선택한다면 민주당 내 실용적 진보주의자와 정의당 등이 주도하는 ‘재난 뉴딜 다수 정치연합’이 가능하고 이는 향후 최소 12년의 정치질서 전환을 만들어 낼 수도 있다. 후자를 선택해도 어느 시점엔 또 다른 정계개편이 발생할 것이다. 루스벨트 뉴딜이 바로 그러했듯이 문재인 행정부의 성공은 진보 정치세력들과의 연합 및 시민이 주도하는 사회운동에 달려있다.

셋째, 전환적 리더십의 루스벨트이지만 안타깝게도 뉴딜 성과의 발전적인 제도화에 대해서는 한계를 노정했다.

그럼 문재인 대통령은? 흔히 뉴딜에 대한 찬사만 접했던 독자들은 나의 이야기가 낯설지 모르겠다. 하지만 루스벨트는 모든 시민들의 일자리, 품위 있는 삶, 주거, 교육, 건강 등의 존엄한 권리를 헌법에 보장하는 2차 ‘권리장전’ 캠페인에서 실패했다. 이후 레이건 보수주의 시대가 본격화되고 제도화 기반이 취약한 뉴딜은 서서히 퇴조해갔다. 특히 정치 불안정성이 강한 한국에서 문재인 대통령과 재난 뉴딜 정치연합은 어떠한 한국형 권리장전을 구축할지 단계적 전략을 고민해야 한다.

사실 루스벨트는 항상 성공한 건 아니다. 대법원 판사 숫자를 늘려 퇴행적 대법원 체제를 극복하고자 한 싸움에서 그는 패배했다. 하지만 예일대 애커만 교수의 지적처럼 미국판 촛불 시민들은 선거 대승을 비롯한 강력한 시민주권 행동으로 뉴딜을 구했다. 그토록 완강하게 뉴딜에 저항했던 수구적 대법원조차도 2차 뉴딜의 핵심 어젠다들을 승인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결국 가장 중요한 건 청와대와 정당, 법원 그 자체가 아니라 바로 이 촛불 시민들과 어떻게 연결되는가이다. 청와대는 물론이고 이번에 다행히 당선된 훌륭한 생태주의 초선 의원들이 가장 중시해야 할 포인트는 바로 이것이다. 당적을 넘어 강력한 ‘재난과 생태 뉴딜’ 그룹을 만들어 기존의 지혜로운 정치가들 및 촛불 시민과 함께 비상조치 시대의 새로운 희망이 되기를 기원한다. 촛불 ‘혁명’으로 2016년 시작된 정계개편의 막이 이제 서서히 오르려고 한다.

원문 | 경향신문 [정동칼럼] 2020년 5월 10일
이미지 | 구글

Previous
Previous

이해찬 대표의 마지막 임무

Next
Next

21대 국회에 바라는 ‘대담한 반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