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도적 애국주의와 ‘조국백서’

2주 전 열린 미국 민주당 전당대회는 가치와 제도를 사랑하는 이들의 감동적인 고해성사 장이었다. 미국 학계에서는 이러한 태도를 ‘제도적 애국주의’라 부른다. 제도에 내장된 가치와 윤리규범을 존중하고 이를 훼손하지 않으려는 이성과 감정을 말한다. 조 바이든과 카멀라 해리스는 아직도 트럼프를 지지하는 저소득층 백인들이 기성 제도를 증오하는 이유를 온전히 이해하지 못한다. 잘 설계된 제도가 작동하던 ‘정상’ 시대로의 복원? 이미 건국의 시조들이 디자인한 근대 소프트웨어 자체가 금권과 거부권 정치, 그리고 자연 착취 시스템으로 변질되었는데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들의 선의와 윤리의식을 존경한다. 민주당 리더들과 콜린 파월 같은 합리적 보수주의자들은 트럼프라는 전체주의와의 절박한 싸움을 위해서 자유주의 정치의 규칙을 내던지거나 자식들의 스펙을 비윤리적 방식으로 디자인하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그들의 조국(미국 말이다)에 대한 진심 어린 공화주의적 애국을 안타까운 마음으로 존경한다.

 

바이든과 달리 나는 애국이 강요되던 나라에서 젊은 시절을 보냈다. 미국의 긴즈버그 대법관은 여성인권과 평등한 사회를 위해 평생 싸워온 진보의 아이콘이지만 때로는 진보진영에 단호하게 쓴소리한다. 그녀의 공적 이성과 실천 도덕으로서의 삶의 무게에 저절로 나의 고개가 숙여진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내가 아니라 엉뚱한 이가 고개를 숙이는 경우가 많았다. 나는 아직도 군사독재 시절, 10년형을 구형받을 때 어느 한 판사가 고개를 숙이던 기억이 생생하다. 남의 인생을 결정하는 순간에 조느라 말이다. 그가 사회적 약자들을 어떻게 대우했을지 짐작이 가능했다. 나는 그때 이 무감각한 기득권 제도를 반드시 무너뜨려야겠다고 입술을 깨물었다. 그래서 나는 조국 전 법무부 장관에게 제기된 윤리적 문제 등의 의혹에 눈을 감고 주로 유무죄 여부만 따지던 지인들의 마음을 이해한다. 우리에겐 사랑할 법과 윤리가 없는 심정이었기 때문이다. 괜히 우리만 우아한 제도주의자가 되면 결과는 저들의 내로남불쇼가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제 흰머리가 희끗해진 나는 대한민국의 제도에 대해 분노하면서도 동시에 사랑하는 회색인으로 변했다. 사실 우리는 이제 공직 윤리와 과학적 이성의 엄밀성을 추구하는 정은경 본부장이나 김영란 전 대법관, 이국종 의사 등을 무수히 만들어내는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이다. 하지만 동시에 기존 법망을 교묘히 악용하여 세습하면서도 왜 한국인들은 정의롭지 못하냐고 일갈하는 내로남불에 여전히 분노해야 하는 나라이다. 조수용 대표의 네이버 사옥 건축 과정을 다룬 백서처럼 직원과 더불어 만들어가는 과정 자체를 더 소중히 여기는 선진국이다. 하지만 여전히 불안 사회에 내몰리며 오직 서울 부동산의 최종 향방에 매달리는 ‘구조적 약탈’(강준만 교수님의 탁월한 표현)이 진행되는 후진국이다.

 

전환기 대한민국은 두 가지 새로운 과제가 동시에 제기되어 있다. 하나는 제도적 애국주의의 성숙 과정이다. 다른 하나는 제도의 불판 자체를 불(탄소 기반 민주주의)이 나지 않는 새로운 인덕션(탈탄소 생명공동체)으로 바꾸는 일이다. 지난 29일 이낙연 민주당 의원의 당대표 당선으로 이제 한국도 대선 국면이 시작되었다. 기존의 친문 대 반문의 대립은 틀렸고 시대착오적이다. ‘민주+공화’에 대한 제도적 애국이냐의 여부로 크게 가치연합의 판을 흔들어야 한다. 좌파 알렉산드리아 오카시오-코르테스(AOC)와 우파 콜린 파월이 제도적 애국의 관점에서는 같이 하는 행보가 우리는 왜 안 되는가? 조국백서의 가장 큰 잘못은 이제 바이든과 해리스의 미국보다 더 사랑할 만한 민주공화국의 제도와 윤리를 본격 만들어야 할 절체절명의 시대에 트럼프 스타일의 내로남불을 선동한다는 점이다.

 

또한 지금의 복합위기 시대에는 단지 좋은 민주주의 제도로는 매우 부족하다. 즉 기존 근대 불판은 가장 나은 버전조차도 현재의 인간 민주주의일 뿐 미래와 다양한 비인간들에게는 자기들만의 닫힌 공동체이다. 바이든과 문재인은 훌륭한 인격의 근대주의자들이다. 하지만 감염병과 기후파국 시대에는 다음 세대 주도의 새 지구적 정치질서와 규범을 만드는 ‘생명정치’ 운동에 다양한 세대와 계층이 연대해야 한다. 이 험난한 두 과제가 동시에 이루어질 때 비로소 바이든과 문재인 행정부도 성공할 수 있다.

 

미국은 물론이고 대한민국은 어쩌면 지금의 고통스러운 코로나19 국면조차 좋았던 시절이라 추억할 파국적 위기와 마지막 대회전을 치르게 될 이후 행정부에 마운드를 잘 물려주어야 한다. 이제 행동해야 할 때이다.

경향신문 [정동칼럼] 2020년 8월 31일
이미지 | 게티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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