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후파국 시대, 달콤한 인생

어느 날 달콤한 꿈을 꾸다가 갑자기 눈물이 났다. 분명히 슬픈 꿈이 아니었는데 왜 이럴까. 그 꿈은 이루어질 수 없기 때문이다.

영화광들은 아마 김지운 감독의 영화, ‘달콤한 인생’의 마지막 대사로 기억할 것이다. 왠지 중독성이 있어 열 번 정도 반복해서 본 이 영화 때문일까. 어느 날 난 유치하게도 주인공인 이병헌 흉내를 내고 있었다. 역시 남자는 중년이 되어도 여전히 소년의 미성숙함이 남아 있는 모양이다. 단지 영화와 달리 나의 꿈에서 주인공은 폭력 조직 중간 보스가 아니라 행정부 보스, 즉 대통령이다. 나의 달콤한 인생 꿈은 다음과 같다.

11월 13일. 어느 대통령 후보는 돌연 선거 캠프를 일단 해체한다. 왜냐하면 전날 폐막된 유엔 기후변화회의에서 국가들은 예상을 뒤엎고 전시 수준의 기후위기 비상 행동을 결의했기 때문이다. 이제 경제, 안보, 복지, 환경, 보건 등 각 파편화된 영역 간 다툼 대신에 캠프를 기후전문가 출신 사령탑의 총 지휘 하에 강력하게 연결된 새 조직으로 재편한다. 투표일이 다가오자 인수위 사전 준비에 해당되는 조직도 일찍 출범시킨다. 그리고 빅 웨이브 등 8개 청년단체들이 주도한 대안을 적극 수용하여 2030년까지 온실가스 총배출량을 2018년 대비 61% 가량 감축하기 위한 전환 로드맵을 꼼꼼히 완성한다.


2022년 5월 10일. 새 대통령은 취임 연설에서 장밋 빛 공약 대신에 ‘정직한 절망’의 현주소를 솔직하게 시민들과 함께 나누어 충격을 던진다. 즉 2050년까지 ‘기후중립’(이산화탄소만이 아니라 모든 인위적 온실가스의 순 배출 제로와 생태계의 회복탄력성)은커녕 탄소중립을 위해 본인과 대한민국이 얼마나 준비가 되어 있지 않으며 본인이 먼저 무엇을 희생할 것인지를 밝힌다. 그리고 나서 의회 및 산업계, 노동계, 그리고 우리 개인들이 무엇을 희생해야 하고 무엇을 합의해야 하는지를 솔직하게 이야기한다. 한국 대통령 연설문의 역사상, 가장 정직한 메시지에 시민들은 조금씩 마음을 열기 시작한다.


2022년 5월 11일. 새 대통령은 일자리 상황판 대신에 기후위기와 불평등 상황판을 설치한다. 청와대 기후 수석을 임명한 후 경제부총리와 한국은행 총재, 국민경제자문회의 의장에 바이든 정부처럼 기후경제에 통찰력이 있는 인사를 임명한다. 그리고 국가안전보장회의 책임자와 국방장관 등도 기후안보의 시야를 겸비한 인물을 배치한다. 초당적 태도와 문제해결 능력으로 유명한 총리는 행정부 관련 인사들 및 각 광역 지자체 장과 함께 매주 주간 기후와 불평등 해결 진척 상황을 점검한다. 새 감사원장은 모든 정책 과정의 예방적, 사후적 정책 감사와 감찰에서 기후위기 대응 관점과 엄정한 윤리관을 적용한다. 물론 대선 후보로 변신할 이상한 꿈은 꾸지 않는다.


취임 100일. 새로이 정부조직 개편으로 만들어진 기후 에너지부와 미국 국방고등연구소 수준의 기후고등연구소가 활동을 시작하고 그간 교황께 자문해온 세계적 거장인 쉘른후버 포츠담 기후영향연구소 전 소장을 임명한다. 가칭 기후와 공동체 봉사단에서는 가치 있는 활동을 통한 참여소득을 보장받고 기후 기술 실리콘밸리와 청년 주도 생태 도시도 광역별로 만든다. 초당적인 협력과 시민들의 공론이 메타버스와 오프라인에서 무르익으면 중국과 에콰도르처럼 생태문명과 자연의 권리를 삽입하는 헌법 개정이 시작된다.


2023년 11월 13일. 유엔기후변화협약 총회는 기후악당에서 기후선진국으로 기적과 같은 전환의 과정을 이루고 있는 새 행정부에 격찬을 보내고 대한민국은 선진국 클럽의 일원이 된다. 미국과 중국이 결국 신냉전에 돌입하고 기후위기 조차 상호 견제의 수단으로 전락하자 사방에서 새 대통령에게 조정자 역할을 요청한다. 한국의 국제적 위상과 억지력이 상승하자 기후와 재난 영역이 정권 안보 차원에서도 중요한 북한 김정은 남매는 한국의 앞서간 기술과 전환 경험의 지원을 요청한다. ‘그린 데탕트’(기후분야 협력을 통한 생명·평화 공동체로의 진전)를 매개로 평화 프로세스의 본격적인 과정이 시작되고 2024년 한국은 뉴욕에서 개최된 유엔 총회에서 안보리 비상임 이사국으로 다시 선출된다.

앗, 눈을 떠보니 뉴욕이 아니라 나의 성남 집 서재이다(대장동은 아니다). 비록 현재로서는 이루어질 수 없는 꿈이지만 너무 달콤하다. 쓰디쓴 현실은 단지 정치인들의 잘못이 아니라 우리들 유권자 다수가 이런 꿈을 원하지 않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나를 포함해서 우리는 청년들을 미래세대라고 칭찬하고 기후위기를 미래 이슈라고 멋있게 표현하면서 사실은 현재 이들을 교묘하게 배제하거나 천천히 해결하려는 꿈을 꾼다. 현 대선 후보들의 얼굴에는 우리들의 거울 속 얼굴이 언뜻 보인다.

영화에서 이병헌은 창가 거울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보며 섀도 복싱을 한다. 나도 서가 옆 거울에 비친 내 얼굴을 물끄러미 들여다본다. 오늘 밤에는 11번째로 이 영화를 한 번 더 보아야겠다. 벌써부터 처가 혀를 차는 소리가 귀에 생생하다. 하지만 나는 달콤한 인생을 포기할 수 없다.

중앙일보 [ 중앙시평 ] 1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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