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냉전 공화주의

피 말리는 대선 승부가 끝나간다. 그동안의 피로감과 공허함이 몰려온다. 자, 이제 뭐하지? 다음 주 방영될 ‘골 때리는 그녀들’의 짜릿한 게임이나 기다려야 하나? 하지만 대한민국은 아드레날린 분비할 일이 많아 심심할 틈이 없다. 아니, 이제 전 세계가 우리를 닮아간다. 승부를 알 수 없는 ‘신냉전’ 게임이 각 국가 내부와 국가 간에 동시에 전개되기 때문이다.

신냉전이라고? 키신저 후예들과 진보주의자는 선뜻 동의하기 어려운 개념이다. 아직 학계에서도 논쟁 중인 주제이다. 하지만 나는 바이든 행정부가 들어설 때 이미 세계는 신냉전과 협력의 모순적인 이중 국면에 접어들었다고 주장한 바 있다. 진보 진영은 지금 갈등은 주로 경제적 패권 싸움이고 글로벌 공급망의 상호의존성으로 인해 과거 냉전의 진영 대결과 다르다고 주장한다. 일리가 있다. 하지만 그들이 과소평가한 게 있다. 지금 갈등의 가장 중요한 본질은 체제간의 실존적 대결이란 점이다. 푸틴, 시진핑, 김정은, 그리고 트럼프는 자기들끼리 마초 유대감이 강하다. 즉 자의적으로 통치할 수 있는 전체주의 욕망과 이해관계에 안전한 정치질서 말이다. 이를 위해 초법적 수단을 동원하는 데 1초도 망설이지 않는다. 키신저의 수제자인 자카리아 워싱턴 포스트 칼럼니스트는 나와 달리 오늘날 세계를 ‘차가운 평화’라 규정해 왔다. 글쎄, 처절하게 항전하는 우크라이나인들이나 폭도들의 미국 의사당 난입으로 사망한 경찰의 유족들도 그렇게 생각할까? 평화에 대한 주관적 희망과 신냉전이라는 객관적 현실을 혼동하면 안 된다.

앗, 그럼 신냉전을 강조해온 보수주의자들이 옳았던 걸까? 천만에. 미국과 한국의 트럼피즘과 네오콘(신보수주의) 후예들은 이 신종 스탈린주의를 상대로 무조건 강압과 레짐 체인지를 추구한다. 심지어 이들의 미국 대부들은 냉전 시절, 군대 경험도 없으면서 소비에트 예방 공격을 자신 있게 주장한 모험주의자들이다. 오늘날 트럼프와 추종자들은 이들 네오콘을 견제한 레이건과 아버지 부시의 보수주의 이성에 관심이 없다.

아, 그럼 바이든과 같은 리버럴들이 옳았단 말이네. 천만에. 그들은 과거 냉전 시절, 전체주의를 상대로 때로는 너무 순진했고 때로는 과잉 대응으로 반작용을 불러일으켰다. 예를 들어 3차 대전 직전까지 간 ‘쿠바 미사일 위기’는 62년 10월이 아니라 미국이 소비에트 바로 앞, 터키에 미사일 배치를 하면서 이미 시작되었다. 하지만 민주당은 냉전이 종료되자 기고만장해져 공화당과 발맞추어 중부 유럽에 나토를 신중하지 않은 방식으로 확대하였다. 이는 친미파 옐친도 분노하게 했고 유라시아 제국 야망의 푸틴에게 좋은 핑곗거리를 제공했다. 오늘날 바이든 진영을 보면 과거 자신들의 순진함, 오만, 어리석음을 참 편리하게도 잊는다.

결국 미국의 네오콘이나 리버럴 모두 냉전, 탈냉전, 신냉전의 단계 마다 무수히 오판한 세력들이다. 우리는 어쩌면 서구 석학들도 명쾌한 답이 없는 새로운 길을 개척해야 한다. 나는 이 방향을 ‘신냉전 공화주의’라 부른다. 이는 지금 세계가 자유주의 대 비자유주의의 체제 간 신냉전 대결과 협력의 복합적 국면이란 점을 냉정하게 인정한다. 이 불확실하고 복잡한 세계에서는 강력한 자주국방과 소프트 파워로 두려움과 존경을 동시에 획득해야 한다. 그리고 비자유주의에 단호하면서도 동시에 모든 다양한 문명권에 대한 겸손과 역지사지의 관점에서 공존공영(공화주의)을 추구한다. 이 가치와 이익의 조화를 위해 과거 김대중 전 대통령이 말한 ‘서생의 문제의식과 상인의 감각’이 그 어느 때 보다 절실하다.

이 신냉전 공화주의는 모든 자유주의 국가의 국내 비전에도 적용된다. 즉 트럼피즘과 같은 비자유주의와 단호히 싸우면서도 다양한 존재의 공존공영의 가치로 사회를 더 성숙시켜 나아가는 노선이다. 예를 들어 차별금지, 비동의 강간죄 처벌에서부터 기후중립에 이르기까지 모든 존재의 다원적 공존과 정의로운 관계를 추구하는 아젠다들이 이 범주에 해당된다.

대선 이후 한국의 보수 진영은 실존적으로 결단해야 한다. 트럼피즘 및 네오콘 세력과 단호히 거리를 두고 합리적 보수주의다운 공화주의로 무장할지 선택해야 한다. 반면에 진보 진영은 내로남불의 실용과 모호성을 넘어 자유주의의 가치를 더 적극 내면화한 실용을 추구해야 한다. 나아가 자유주의의 편협한 한계를 부단히 넘어서는 촉진자로서 진보적 공화주의를 만들어가야 한다.

과거 냉전기 걸출한 전략가인 조지 케넌은 전체주의와의 싸움에서 가장 중요한 건 그들처럼 괴물이 되지 않도록 민주공화국 내부의 활력을 유지시키는 점이라고 간파한 바 있다. 대선 이후 각 진영이 민주공화국의 가치 기반 속에서 저마다의 노선을 새로이 정립해 경쟁하고 협력할 때 우리는 다가오는 ‘퍼펙트 스톰’을 돌파할 수 있다. 프로축구 선수보다 더 비장한 결기로 싸우면서도 게임 후에는 함께 눈물을 흘리고 함께 성장해가는 골때녀의 공화주의적 우정이 부럽다.

중앙일보 [ 중앙시평 ] 3.8
이미지출처 [ 뉴욕타임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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