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수주의 시대 개막은 착각이다

윤석열 인수위는 사실상 보수 시대 부활을 위한 로드맵을 짜고 있다. 이제 곧 이게 거대한 착각이라는 걸 깨닫게 될 텐데 말이다. 앗, 보수 정치 시즌 개막이 아니라고? 그렇다. 지금은 기존 진보와 보수의 낡은 패러다임이 퇴조해 가는데 새로운 건 분명히 손에 잡히지 않는 혼돈스러운 이행기이다. 제레미 수리 교수는 오늘날 복잡한 과제와 기대치를 충족시키기 어려운 구조적 상황의 미국을 ‘불가능한 대통령직’의 시대라 부른다. 글쎄, 그가 한국을 들여다본다면 아마 대선 토론 때 안철수 후보 보다 더 고개를 크게 흔들게 틀림없다. 이제 곧 윤석열 대통령의 하루 일과는 기후, 공급망, 사이버 전쟁, 핵, 대만, 바이러스 변이 등에 임시변통으로 반응하는 회의로 채워질 예정이다. 기존 교과서를 들쳐보아도 답이 없는 뉴 노멀 복합위기 이슈들이다. 아 그런데 시계를 들여다보니 겨우 오전이 지났다. 오후에는 연금, 부동산, 일자리 회의가 기다린다, 벌써 책상에는 엄청난 제목의 두툼한 보고서들이 산처럼 쌓인다. 이건 언제 다 읽지?

아니, 굳이 읽을 필요가 없다. 리더에게 더 중요한 덕목은 시대의 흐름과 자신의 위치에 대한 예리한 감각이다. 윤 당선인이 RE100를 몰랐던 건 주무부처 장관에게 들으면 된다. 안철수 인수위원장이 자부심을 가지는 연금 이슈도 초당적 위원장을 임명해 보고하게 하면 된다. 하지만 시대와 위치 감각은 DNA에 새겨져 있어야 한다. 지식이 얕아서 기자들을 조마조마하게 했지만 금융실명제라는 위대한 업적을 낸 YS의 본능처럼 말이다. 미국 정치에서는 이를 ‘시대의 결’과 ‘정치자본’으로 표현한다. 즉 마치 은행의 잔고에 돈(시대가 부여한 유권자의 민의의 정도)이 어느 정도 남아있는가를 항시 생각하며 투자 할 수 있는 일과 투자해서는 안 되는 분야를 구별하는 능력이다. 또한 투자 분야만이 아니라 투자하는 방식에서도 시대 흐름에 맞아야 한다. 역대 행정부들이 진보이든 보수이든 다들 자신 은행 잔고와 투자 방식에 대한 감각이 좋지 않았지만 특히 이번 인수위는 더 그러하다. 설마 저축 은행 잔고와 투자 실패를 일거에 만회할 검찰이라는 부자 친정이 있어서 그런 건 아니겠지?

윤 당선인이 위치한 이행기와 정치자본의 빈약함을 고려할 때 나 같으면 선제적 포용 투자 전략을 추구하겠다(선제 타격이 아니라). 미국 스테판 스커러닉 예일대 교수의 표현을 빌자면 선점(preemption) 형 리더십이다. 민주당과 정의당이 선도하는 시대적 흐름과 가치를 오히려 선점하는 방식을 말한다. 너무 이상적이라고? 천만에. 정치력이 걸출했던 보수 대통령들이 즐겨 취하는 전략이다. 진보의 시대에 보수 대통령인 닉슨이 불가피하게 이를 시도했고(그래도 0.73%포인트 보다는 훨씬 더 얻었다) 보수주의 시대를 만개한 레이건 조차 일부 그러했다.

불가능한 상상이지만 내가 윤 당선인이라면 이재명 후보의 기본소득 멘토를 위원장으로 임명하는 일부터 시작하겠다. 보수 대통령인 닉슨의 첫 아젠다가 기본소득이 되자 당시 미국 민주당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기본소득은 흔히 오해하는 것과 달리 지금 국민의힘과 민주당, 그리고 정의당 강령 사이에서 쉽게 절충점을 찾을 수 있는 공통 공약이다. 물론 전통적인 진보와 보수의 주류 복지론자들은 반대한다. 하지만 갈수록 극단적 양극화가 심화되는 추세에서 최소한 작은 실험의 축적에는 굳이 반대할 이유가 없다. 또한 환경보호처를 만든 닉슨의 업적처럼 반기문 전 유엔사무총장에게 기후위기 대응의 총사령관 권한을 부여하면 어떨까.

닉슨처럼 민주당 아젠다를 대담하게 선점하기 어렵다면 최소한 레이건 배우기 정도는 어떠한가? 레이건은 당선되자마자 그의 ‘레핵관’(레이건 핵심 관계자)들을 분노하게 하며 비서실장으로 별 인연도 없는 제임스 베이커를 임명했다. 대통령과 레핵관들에게 계급장 떼고 강력하게 노우(No) 할 수 있었던 그의 기질과 지혜 덕분에 레이건은 집권 초기를 성공적으로 연착륙 시켰다. 과연 윤석열 비서진과 내각은 베이커의 절반 수준이라도 노우(No)할 수 있을까?

흔히 미국의 진보주의자들은 레이건을 무조건 강경 우파로만 오해하곤 한다. 하지만 레이건은 힘에 기초한 평화를 추구하면서도 실용주의 본능 덕분에 네오콘(강압적 개입주의자)들에게 덜 휘둘릴 수 있었다. 특히 그는 호전적 마초 이미지를 불식시키기 위해 84년 이후 피스메이커로 이미지 변신을 꽤했고 역지사지 태도를 통해 고르바초프의 마음을 움직이는 데 성공했다. 과연 윤 당선인은 다가오는 한반도 전쟁 위기 앞에서 미국과 한국의 네오콘들을 실망시키며 피스메이커로 변신할 수 있을까?

문재인 행정부는 혁신적 포용 국가론을 추구했다. 그 공과에 대한 평가를 떠나서 현 정권에서도 계승할 건 이어가겠다는 윤 당선인의 말을 믿고 싶다. ‘선제적 포용 국가론’을 자신의 좌표로 삼으면 어떨까? 자신이 직면한 ‘시대의 결’과 정치자본의 크기를 무시하면 다가오는 퍼펙트 스톰 앞에서 보수가 아니라 대한민국 호 자체가 좌초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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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감각, 무지, 무능의 대연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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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냉전 공화주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