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TS와 나의 해방일지
오늘 계란 흰자(경기도)에서 노른자(서울)로 출근하는 길이 더 이상 지겹지 않다. 왜냐하면 대통령을 만날 생각에 들떠 있기 때문이다. 단 내가 아니라 BTS가 오늘(현지 시간) 바이든 대통령을 만난다. 그렇다, 나는 BTS를 ‘추앙’(응원)하는 아미교수단의 일원이다. 백악관에 따르면 아시안 증오범죄를 퇴치하고 다원성과 포용성의 미래로 나아가는 길을 이번 만남에서 함께 의논한다. 특히 이번 행사가 반가운 이유는 마침 내가 속한 BTS 연구 공동체(ISBS)가 7월 14일부터 한국 외대에서 ‘포스트 팬데믹 시대, 새로운 휴머니티와의 조우’를 화두로 국제 컨퍼런스를 열기 때문이다.
정치계와 팝 음악계의 두 정상이 만나는 이 ‘정상회담’을 위해 백악관은 어떤 준비를 했을까? 내가 바이든이라면 며칠 전부터 손녀 나오미와 노래연습부터 하겠다. 손자뻘인 BTS와 만나는 자리에서 갑자기 ‘소우주’(마이크로코스모스) 노래를 불러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하는 바이든 할아버지의 모습은 상상만 해도 멋지다. 과거 반복되는 총기 사고의 현장에서 갑자기 연설을 때려치우고 ‘어메이징 그레이스’를 불렀던 오바마의 감동처럼 말이다.
이번 만남은 특별한 세 가지 의미가 있다. 첫째로, 오늘날 미국만이 아니라 극단적으로 분열된 모든 시민공동체의 통합을 위한 예술의 힘이다. 각자의 존엄을 노래하는 BTS의 예술세계는 그 어떠한 제도나 이성적 훈계로도 접근하기 어려운 인간 근저의 영혼을 깊이 건드린다. 그들은 “어쩜 이 밤의 표정이 이토록 또 아름다운 건 저 별들도 불빛도 아닌 우리 때문일 거야” 라고 노래한다. 서로 다른 각자가 다 소중한 하나의 소우주라는 걸 잊어버릴 때 모든 혐오는 좀비처럼 살아난다. 김승섭 교수가 지적하듯이 천안함 용사들과 세월호 희생자들은 모두 다 ‘추앙’받아야 할 귀한 존재라는 걸 상기할 때 우리는 진영의 높은 장벽을 넘어설 수 있다. BTS와 아미처럼 예술과 다양한 의례를 통해 ‘포용(혹은 확장) 민주주의(Inclusive Democracy)’로 나아가야 한다.
둘째로, BTS는 좋은 추앙이 가능하다는 걸 보여준다. 사실 난 사람들에게 아미라는 걸 밝히기를 주저할 때가 많다. 왜냐하면 마치 대상에 대한 이성적 거리두기에 약한 청소년기에 멈춘 존재로 취급받을까 두렵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떤 대상에 대한 강렬한 애착은 인간이 가지는 가장 자연스러운 특징이다. 그리고 흔히 오해하듯이 팬덤은 무조건 광기어린 추앙의 종류만 있는 것이 아니다. BTS와 아미들은 오히려 자신이 사랑하는 BTS와 이를 떠받치는 생태계가 기업의 이윤논리를 넘어 더 나은 공동체가 되기를 꿈꾸고 애정 어린 비판을 아끼지 않는다. 그래서 어떤 아미교수는 사랑하는 자식 키우는 엄마 심정이라고 토로한다. 성숙한 사랑이 그러하듯이 자신이 애착을 가지는 대상이 더 나은 인간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성숙한 팬덤이다.
셋째로, 이번 초대는 아미와 같은 팬덤이 기존 정당 등의 전통적 정치영역보다 더 탁월한 공적 활동이 가능하다는 걸 암시한다. 실제 전 세계 아미들의 숫자는 작은 국가를 수립할 수 있는 규모이다. BTS와 아미들은 더 인간다운 세상을 위한 다양한 시민 개입주의 행동을 펼치고 있다. 예를 들어 청각장애인 지원에서부터 여성대상 증오범죄, 기후위기 대응과 기부에 이르기까지 진정한 정치라면 다루어야 할 중요한 영역에 개입하고 있다. 애쉴리 힝크 교수는 과거 해리포터 팬덤 등을 분석하면서 이러한 새로운 공적 팬덤을 가리켜 ‘팬 기반 시민행동’의 등장이라고 규정한 바 있다.
마지막으로 이번 회담은 신냉전 시대, 인류 문명이 가야할 방향에 대한 실마리를 제공한다. 냉전 시절, 우리에게 꿈과 영감을 준 존 레논과 존 바에즈가 있었다면 신냉전 시절에는 BTS가 있다. 배리 틸러리 조각가가 ‘냉소적 이상주의자’라 칭한 존 레논은 ‘인스턴트 카르마’ 노래에서 디스토피아에도 불구하고 절망하지 않고 우리 스스로가 유토피아임을 노래했다. 조안 바에즈는 사라예보 내전 현장에서 방탄조끼를 입고 어메이징 그레이스를 불렀다. 슬픈 눈빛의 이상주의자인 방탄소년단은 서로의 취약함을 인정하면서도 이 혐오와 적대의 팬데믹으로부터 우리를 지키는 방탄조끼를 제공한다. 이들 모든 예술가들은 신냉전의 전사, 바이든과 달리 단지 자유주의를 노래하지 않는다. 인권 옹호의 자유주의를 포함하면서도 나아가 지구행성 속의 70억개의 각자의 별로서 평화와 존엄을 이야기하는 보편성은 바이든 보다 더 호소력이 있다.
비록 당분간 한국 정치와 세계는 우울한 전망들과 비극으로 가득하지만 그래도 난 존 레논과 BTS의 이상주의에 공감한다. 그들이 노래하듯이 “우리는 모두 빛난다”는 사실과 “밤이 깊을수록 더 빛나는 별빛”을 믿는다. 바이든과 BTS의 백악관 만남 이후 전 세계가 차별과 혐오를 근절하기 위한 더 강한 연대와 입법 투쟁에 나서길 소망한다. 우린 모두 계란 흰자이고 노른자이다.